[월요칼럼] 푸른 용의 해, '리얼 개천용'을 기대하며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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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08 07:08  |  수정 2024-01-08 07:09  |  발행일 2024-01-08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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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논설위원

'○○○군은 고되게 청소부 일을 하시며 자식을 키워온 어머님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했다. ○군의 어머니는 사고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군 등 3남매를 키웠다.' 1980년대 대입 학력고사(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수험생 얘기를 담은 신문 기사 중 일부다. 그랬다. 그 시절 전국 수석은 '스토리'가 있었다. 이른바 '개천용(개천에서 용 난다)'의 인간승리극이었다. '하면 된다'라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작금은 어떠한가.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대입 수능 기사 헤드라인이 사라진 지 오래다. 경상도 말로 '이바구가 안되는' 까닭이다. 가슴 뭉클한 전국 수석 스토리가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 수능의 유일한 만점 학생과 표준점수 전국 1등 학생은 같은 입시학원 출신이었다. 서울 강남의 유명 재수 종합학원이다. '족집게 문제'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학원비(월 300만원)와 기숙사비(월 150만원)를 합치면 월 45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아닌 '통장에서 용 난다'임을 실감케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옛 어록이 떠오른다. 그는 "모두가 용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래놓고선 자신의 아들·딸은 특목고에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딸은 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을 필기시험 한 번 안 치르게 해서 합격시켰다. '정의주의자(正義主義者)'로 여겨져 온 그의 표리부동에 많은 젊은이가 분노했다. 문득, 그에게 묻고 싶다. 여론에 떠밀려 사과는 했지만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를.

푸른 용의 해,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펼쳐졌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판(版) '개천용'을 꿈꾸는 지망생이 줄을 잇는다. 개중 일부는 오랫동안 중앙에서 한자리하다 때맞춰 고향을 찾아 표심을 얻으려는 이들이다. 선거 명함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개천도 아닌데 개천이라며 서민의 환심을 사려 한다. 난센스다. 공천이 여의치 않으면 십중팔구 뒤도 안 보고 다시 돌아갈 이들일 게다. 귀감이 될만한 '개천용' 정치인도 없지 않다. 포항 출신인 김미애(부산 해운대을·국민의힘) 국회의원이다. 명문 포항여고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형편에 학업을 접고 방직공장에 취업했다. 3교대로 쉴 새 없는 가운데서도 부설학교에 다녔다. 29세 때 야간 법대에 들어가 34세 때 당당히 사법시험을 패스했다. 10년간 국선변호만 762건을 맡는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해 애써온 이력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지난달, 35년 만에 포항여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고향 포항에 대한 애정도 남다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정치가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한 예라 하겠다.

모든 '개천용'을 신뢰하진 않는다. 체득해 온 경험칙이 있지 않은가. '개천용'이 되고 나면 '딴 사람'으로 돌변한 이들 말이다. 강준만 교수는 과거 저서에서 "개천용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개천을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데 앞장서 왔다"고까지 일갈했다. 일견 공감이 간다. 막대기만 꽂아도 된다는 대구·경북 총선, 그 오명에서 벗어나려면 '스토리'가 넘쳐나야 한다. '인간극장'급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역과의 신뢰·의리를 지켜나갈 품성을 갖춘 '리얼(real) 개천용'이 나와야 한다. 선거가 빛이 나고 축제로 승화하는 길이다. 우리 유권자가 '옥석'을 가릴 눈을 키워야 할 때다.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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