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8> 정주영의 돌직구식 도전정신

  • 홍하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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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12  |  수정 2024-01-12 07:44  |  발행일 2024-01-12 제13면
한겨울 유엔군 묘지를 푸른잔디밭으로 둔갑…정주영의 천재적 사업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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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아이젠하워와 사병들. 〈출처: 아이젠하워 도서관〉
◆정주영의 6·25전쟁

부산에서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이병철은 전쟁이 이제나 끝나나 저제나 끝나나 라디오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사업을 하고 있긴 해도 전쟁 중의 상황이라 모든 걸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주영도 6·25전쟁 와중에 일단 부산으로 피란 가긴 했으나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강을 건널 때도 다리가 파괴되어 동생 정인영과 헤엄쳐서 건넜다. 그리고 그때부터 걷거나 트럭을 얻어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서 부산까지 내려갔다. 동생 정인영은 매일 하야리아 미군부대 앞의 다방에 가서 죽치고 있었다. 혹시 미군부대에 일거리가 생기면 뭐라도 할 작정이었다.

부산은 만원이었다. 300만명이 넘는 피란민이 내려와 닥치는 대로 뭐라도 해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6·25 와중에 정주영도 고전하고 있었다. 1952년, 정주영의 나이 37세 때이다.

아이젠하워 美대통령 한국 순방길
보리밭 떠다가 묘역 단장해 신임 얻어
창의적 아이디어로 기지 발휘한 일화
전쟁통 미군 숙소 공사도 성공적
단 3주만에 화장실 등 현대식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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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리아 부대 전경. 〈출처: 국가기록원〉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의 한국방문

1952년 11월4일, 미국의 아이젠하워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가 됐다. 그는 전쟁 중의 한국을 방문한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아이젠하워의 선거공약은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한반도의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것이었다.

그해 미국당국은 12월2일부터 5일까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공식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미 8군과 한국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한겨울의 혹한에 한국을 찾아오는 미국의 국가 원수에 대해 그에 걸맞은 의전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린 서울에는 당장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잘 숙소조차 없었다. 더구나 기한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미 8군은 고민에 빠졌다. 군부대 내에 숙소를 마련할 수도 있었으나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일단, 숙소는 우선 종로 3가에 있는 운현궁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운현궁은 한옥이어서 푸세식 화장실과 난방이 문제였다. 미국의 대통령이 쪼그려 앉아서 일을 보게 할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 공사를 맡길 것인가. 미군과 한국정부가 고민했다.

광복 직후인 1948년부터 서울에서 현대토건사라는 건축토목회사를 경영하는 정주영이라는 기업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정말, 자신이 있는가?" 한국 정부와 미군 측은 몇 번이고 정주영에게 되물었다. 시간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주영이 하겠다고 했다. 결국 정주영에게 공사가 갔다. 양변기라곤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정주영이었지만, 기간 내에 공사를 마치면 공사비를 갑절로 주지만 공사를 못하면 벌금을 갑절로 내는 데 합의를 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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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서울 남대문상가의 모습. 〈출처: AP통신〉
정주영은 일꾼들을 끌고 서울 시내 일대의 고물상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피란 가 버린 남대문, 용산 일대의 빈 고물상에서 정주영은 보일러통, 파이프, 세면대, 욕조, 양변기들을 하나씩 찾아냈다. 주인이 없어서 고물상 문짝에 가져간 물건과 돈 받을 곳을 써 놓고 돌아왔다.

그렇게 주워 모은 자재들로 이리 붙이고, 저리 이어서 밤을 새우고 공사를 했다. 문짝도 갈고 수도꼭지도 갈고, 도배도 새로 해서 단 3주일 만에 새롭게 침실을 현대식으로 꾸미고 수세식 화장실과 난방공사가 완료되었다.

공사가 성공리에 끝난 걸 확인한 미 8군 관계자들은 정주영에게 '현다이 넘버원'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최전방에 가다

1952년 12월4일 전선의 최전방인 주한 미 3사단 15연대를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시찰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직전 한반도에서 전쟁 종식을 공약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쟁의 최일선인 38선 근처를 돌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소령으로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장병들 속에 있는 아들과 눈 한번 마주치고는 다른 부대로 가서 사병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15연대 장병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마친 후 잭 허처슨 병장, 캐스퍼 스커들렉 일병, 제임스 머레이 상병과 함께 야전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 세 명의 사병은 며칠 후 전사했다. 6·25 전쟁에서 죽은 미군의 숫자는 3만5천316명이다.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비통했다. 한반도 전쟁에서 사망한 부산의 미군 묘지를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부산의 미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부산 유엔군 묘지 공사

그때 부산 하야리아 미군부대 앞의 다방에서 죽치고 있던 동생 정인영에게 알고 지내던 미군중위 맥칼리스터가 정인영의 테이블로 왔다.

"헤이, 정! 큰일 났다. 며칠 있다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그 일행이 부산에 내려온다는데 전쟁 중에 전사한 미군들의 묘지를 돌아볼 예정이다. 그런데 그 묘지라는 게 엉망이다. 그걸 대통령이 보면 노발대발 할거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묘지를 엉망으로 해놓고 있으니, 무슨 방법이 없겠나? 한겨울이라 잔디도 없고."

정인영은 그길로 형님 정주영에게 보고했다. 때는 한겨울. 도대체 어디 가서 잔디를 구한단 말인가. 당시 유엔군 묘지는 한창 조성 중이라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황량한 곳이었다.

전쟁 중인 겨울의 이 땅 어디에서 잔디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총알같이 내려간 정주영 회장은 트럭 30대를 동원해서 낙동강 둔치의 보리밭을 통째로 샀다. 그걸로 유엔군묘지를 덮기 시작했다. 철야 돌관작업이다.

단 보름 만에 생난리를 쳤지만, 공사는 끝났다. 한겨울의 유엔군 묘지는 곧 푸른 잔디밭처럼 변했다.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를 방문한 참전사절단들은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을 보고 원더풀을 연발했다. 어수선한 시절이다. 이게 정주영의 본격 데뷔전이다. 물론 그 이전, 즉 일제하에서부터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도 하고 있었으나, 토목건축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병철, 제당공장 만들기

자본금 6억원. 이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병철이 조사에 나섰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 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의 하나였다. 공산품이나 소비재는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 결과 설탕, 페니실린, 종이 등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당시 설탕 가격은 외국보다 세 배나 비쌌다. 결론은 설탕이었다. 3개월 후 제당건설에 필요한 마스터 플랜을 만들었다. 일본 미쓰이 물산이 적극 협력했다. 설탕 제조 장비를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53년 6월 부산 대교로에 있는 제당회사 설립을 위한 설립 사무소에서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자본금은 2천만 환. 주주는 친구였던 여상원 외에 구영회(LG그룹의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 허정구(1911~1999. LG그룹의 공동창업주 허만정 집안의 장남, 전 삼양통상 회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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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허정구는 이병철보다 한 살 아래로 보성전문(오늘날의 고려대) 법학과 출신이다. 그는 진주 지수면의 대지주였던 아버지 허만정의 땅을 물려받아 지주로서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는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일찍이 마산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산업사회가 온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공장부지는 전포동에 있는 부산 고무공업사의 빈터 1천500평이었다. 일본에서 장비구입 견적서가 도착했다. 원심분리기 4기와 결정관 1기의 플랜트는 15만달러, 도입에 따르는 제반 경비는 3만달러로 모두 합쳐서 18만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외환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1953년 말 우리 정부가 보유한 외환은 총 1억874만달러였다. 달러가 황금보다 더 귀한 시절이다. 그러나 정부도 제당사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18만달러의 외환을 배정해 주었다.

한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기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계 자체를 일본인이 생산하였으므로 기계의 특성과 운용을 속속들이 알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국제전화를 해대거나 편지로 일본에 문의했다.

악전고투의 6개월. 그 와중에도 공장은 완공되었다. 연건평 800평, 하루 25t 생산 규모의 설탕 공장이었다. 드디어 시운전의 날이 되었다. 기계가 굉음을 내면서 돌기 시작했다. 검은 액체가 줄줄이 쏟아졌다. 지켜보던 일행은 아연실색했다. "웬, 검은 액체?" "이게 대체 무슨 일?"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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