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엄혹한 시기에 민주주의를 외친 함성
1960년의 한국은 참담했다. 십 수년째 계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몰아갔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권력을 강화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2·28민주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당국이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인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대구상고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28일 오후 1시경 경북고생 800여 명이 대구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경북도청으로 향했으며 대구는 곧 불의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서슬 퍼런 이승만 독재에 움츠렸던 대구지역 언론은 어린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28의 함성은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가장 무섭고 어두운 밤, 새벽이 온다는 누군가의 외침은 소리는 작아도 울림은 컸다. 가장 엄혹한 시기에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외친 2·28의 함성은 대한민국을 덮었다. 2·28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뿌리로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주주의 실천 운동이었다.
김수일 기자 / maya1333@yeongnam.com
김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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