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9> 제일제당과 현대건설

  •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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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08  |  수정 2024-03-08 08:04  |  발행일 2024-03-08 제13면
아침에 싣고 나간 한 트럭 설탕, 저녁엔 한 트럭 돈이 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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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제당 창업 무렵의 이병철.

◆ 웬, 검은 액체?

기계가 굉음을 내면서 돌기 시작했다. 검은 액체가 줄줄이 쏟아졌다. 지켜보던 일행은 아연실색했다. 이게 대체 뭔일인가? 기술자 한 사람이 "아니 웬놈의 원료를 이렇게 많이 넣는 거요. 원당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어서 기계가 균형을 잃은 거요" 하고 말했다. 이병철이 기술자들에게 원료를 조금만 넣고 균형을 맞추면서 기계를 돌려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부터 순백색의 설탕가루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53년 11월5일의 일이었다.

어렵게 설탕이 생산되었으나 문제가 또 있었다. 설탕을 담을 부대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엔 비닐봉지를 쓰지만 비닐이 없던 시절에는 흰 천으로 설탕 부대를 만들어 썼다. 문제는 국내에서 생산된 흰 천에 설탕을 담으면 설탕 가루가 줄줄이 새어버리는 것이었다. 설탕을 담을 천은 공기가 통하면서도 설탕이 새지 않아야 한다. 미군이 쓰다 버린 낙하산으로 여성들의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던 시절이다. 결국 일본에 기술자를 보내 설탕 부대를 만들 직조기계를 구입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설탕 부대용 천을 꿰맬 수 있는 재봉틀이 없었다. 재봉틀 구하기에 나섰다. 결국 설탕 부대 제작용 재봉틀은 일본에서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수소문 끝에 중고품을 구해 미군 군용기에 실어왔다.

첫날 생산된 설탕은 6천300㎏이었다. 설탕은 근당 100원에 부산 총판인 신일상회로 넘어갔다. 당시 수입 설탕은 근당 300원이었으므로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싼값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외국산 설탕과 마찬가지로 순도 99.9%이며 색깔도 똑같은데 팔리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국산품은 싸고 나쁜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불과 보름이 지나자 설탕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먹어본 사람들이 입소문으로 품질에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값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으므로 모두들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국산=저질' 편견에 첫 시장반응 냉담
보름 지나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동종업 난립 제당 전국시대 열렸지만
선발기업 경영합리화로 점유율 70%



물건이 달리자 공장은 24시간 가동되었다. 아침에 설탕을 한 트럭 싣고 나가면 저녁에는 돈을 한 트럭 싣고 돌아온다고 할 정도였다. 하루에 6.3t 생산되던 설비를 2년 만에 그 여덟 배 가까운 50t 규모로 늘렸다. 제일제당이 설립되기 전 한국은 설탕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일제당이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수입 의존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1954년에는 수입량이 전 해에 비해 절반인 51%로 떨어졌고, 55년에는 다시 그 절반인 27% 수준이 되었으며, 56년에는 수입량이 국내 소비시장의 7%까지 떨어졌다. 설탕의 자급자족이 달성된 것이다.

이병철은 설탕의 수요가 급속히 국산품으로 대체됨에 따라 시설을 계속 확장하고 원가절감을 위한 최신기계를 도입했다. 제일제당은 당시의 삼성그룹이 최초로 시도한 근대적 기업으로서의 첫 성공이다.

53년 첫해에 하루 6.3t씩 생산되던 설탕은 6개월 후에는 50t으로 늘어났고, 1956년에는 하루 150t(연산 5만t), 57년에는 하루 200t(연산 7만t)으로 시설이 늘어났다. 매출도 설탕이 생산된 첫해엔 7억2천2백만환이던 것이 1958년에는 그 여덟 배인 56억환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에 따라 순이익도 엄청나게 발생했다. 54년의 순이익은 1억6천200만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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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제당 공장의 설탕 포장 모습.

제일제당이 설탕 사업에서 성공하자 국내에는 그 이듬해에 서울 용산에 동양제당에 이어 한국정당(서울 영등포), 삼양사(경남 울산), 금성제당(서울 용산), 해태제과(서울 영등포), 대동제당(경기도 시흥) 등이 설립되어 한국의 제당업계는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간다. 시장이 난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의 설탕 공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 당시 제일제당을 비롯한 국내업체의 연간 생산량은 15만t이나 되었다. 그에 비해 연간 소비량은 5만t에 불과했다. 따라서 공급이 수요보다 3배나 많게 되자 덤핑이 시작된다. 이른바 제당 전국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제일제당은 선발기업으로서 이미 기반을 닦았고 경영 합리화를 추진해 나가면서 국내 설탕시장의 70%를 점유했다.

제일제당이 설립되어 설탕이 공급되자 가정 문화도 바뀐다. 반가운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설탕물을 타줬던 것이다. 주스나 커피 등이 없던 시절이어서 손님에게 설탕물을 타 주는 게 당시엔 최상의 대접이었다. 이병철이 성공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를 하면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 정주영은 고령교에서 파산

1954년 4월, 조폐공사에서 발주한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가 생기는 바람에 현대건설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였으나 그 당시 교각은 기초만 남아있고 상부 구조물은 물에 처박혀 있었다. 정부에서는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시급히 교량을 복구해야 했다.

고령교 공사는 당시 정부공사로서는 최대규모였다. 당시의 공사 금액은 5천457만환. 24개월 만에 공사를 끝내야 하는 토목공사였다. 이 다리 공사에서 정주영은 6천500여만환 넘는 적자를 보고 만 것이다. 그 전해에 설립된 제일제당의 자본금이 2천만환이었으니 그 세 배 넘는 돈을 적자를 본 것이다.

국내 최대의 토목공사이니만큼 정주영은 이 다리공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복구공사지, 거의 전파된 다리여서 차라리 새로 다리를 건설하는 편이 더 쉬울 정도였다. 겨울에는 물이 말라 흰 모래가 드러났으나 여름철엔 그 반대로 낙동강 물이 불어 갑자기 수심이 몇 배 깊어지는 곳이었다. 당시 정주영이 가지고 있던 장비는 크레인 한 대, 믹서기 한 대, 컴프레서 한 대가 전부였다.

장비가 부실하다 보니 공사 대부분이 사람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교각 한 개를 철근을 넣고 콘크리트를 쳐서 세워 놓고, 또 다시 한 개를 세우고 하는 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교각은 번번이 강물 속으로 떠내려가 버렸다. 결국 정주영과 현대건설은 교각을 채 한 개도 박지 못했는데, 그사이 물가는 120배 뛰어버렸다. 엄청난 인플레였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계약은 했으나 공사를 끝내지 못했으니 대금은 당연히 나오질 않았고, 인부들은 임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쳤다. 정주영은 동생 정순영이 살던 삼선동의 20평짜리 기와집을 팔도록 하고, 매제 김영주가 살던 돈암동 종점 근처의 20평짜리 집도 팔았다. 그 외에 임원들의 집도 팔아서 모자라는 공사비에 충당하였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자신이 운영하던 초동자동차 공장부지까지 팔았고, 거기다가 월 18%나 되는 이잣돈을 내서 그 돈으로 임금을 주고 공사대금 1억여환을 마련했다.

결국 고령교 공사는 당초 계약기간보다 2개월 늦게 완공되었다. 공사 대금을 다 받아봤자 그보다 더 큰 빚이 남았다. 공사가 끝났지만 현장에서 장비를 철수시킬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지경이었다. 빚쟁이들은 아우성을 치고 동종 업자들의 질시도 극심해졌다. 소학교밖에 안 나온 정주영이 인플레가 뭔지 알겠느냐, 정주영이는 이제 끝났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계약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손해보면서까지 공사를 감행한 것은 '신용' 때문이었다. 신용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이어서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는 아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결코 실패가 아니다.'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 실패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달랬다. 실패를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실패의 뿌리를 끝까지 붙들고 재기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정주영은 '채근담'에 나오는 '득의지시 편생실의지비(得意之時 便生失意之悲)' 즉 '뜻을 이룰 때 실패의 뿌리가 생긴다'라는 의미의 글귀를 좋아한다. 그는 실패를 해도 그 뿌리를 결코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뿌리의 싹은 '신용'이라는 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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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오늘날 현대건설 사옥에는 아래와 같은 휘호가 걸려있다.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령교 공사의 실패를 통해 얻은 정주영의 교훈을 적은 것이다. 담담한 마음으로 정주영은 누워서 자기의 쓸개를 쓰다듬는 와신상담의 긴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령교 공사로 인한 빚 6천500만환을 갚는 데는 그후 20년이 걸렸다. 현대건설은 고령교 복구공사로 큰 손해를 보았으나 그때 쌓은 신용 덕분에 2년 뒤인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 다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이병철과 정주영 두 사람은 이후 한국경제를 이끄는 양대 기관차이자 라이벌이 된다.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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