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 달성공원 대구 신사 도리이에 새겨진 '해야무남(海野武男)'

  • 송은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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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19 10:15  |  수정 2024-03-20 08:46  |  발행일 2024-03-20 제24면
일제강점기 대구 권번 최대 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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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 테니스장 입구에 '해야무남(우미노 다케오)'이라는 일본 이름이 새겨진 도리이 초석이 자리해 있다.

대구 달성공원 테니스장 입구에는 일제강점기 대구 신사 도리이(鳥居)에 사용된 석조물 두 점이 있다. 이 돌은 대구 신사 입구에 세웠던 도리이 기둥과 받침돌로 추정된다. 도리이는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하는 상징물로 우리나라 홍살문과 성격이 비슷하다.

받침돌 옆면에는 1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강산현인(岡山縣人)' '원죽사(原竹事)' '해야무남(海野武男)'이다. 강산현(오카야마현) 사람 해야무남(우미노 다케오)이 대구 신사 건립에 공이 있어 이름을 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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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돌 옆면의 '강산현인' '해야무남' 표기 사이에 '원죽사' 글씨가 새겨져 있다.


베일에 싸여 있던 해야무남의 정체가 일부 확인됐다. 1915년 고등여학교 설립비 찬조로 총독부로부터 목배(木杯)를 받은 일본인 명단 중에 해야무남이 보인다.(조선총독부관보, 1130호, 1916년) 10원을 찬조한 그의 이름 옆에는 '강산현 평민'이라 기재돼 있다.

그는 1920년 설립된 합자회사 '집홍사(集紅舍)'의 2인자였으며(2284호, 1920년), 1922년 설립된 주식회사 '대구 권번' 최대 주주였다.(3003호, 1922년) 집홍사와 대구 권번은 기생조합이다. 1925년 '대구상공명록'에는 해야무남이 촌상정(향촌동)에 있는 자본금 3만원 규모의 기타 잡업 대표자로 돼 있다. '원죽사'는 정확한 의미를 확인할 수 없다.

달성공원에 신사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06년이었다. 당시는 신사가 아닌 '요배전'이란 작은 사당이었다. 요배전은 목조건물로 일왕 소유의 일본 기소 지역에서 가져온 편백나무로 지었다. 주변 숲 역시 시모노세키에서 가져온 6만 그루의 나무로 조성했다. 1914년 요배전을 정비해 대구 신사를 세웠고, 1924년 신사를 대규모로 확장했다.

1928년 일본인 단체 갑진회에서 신사 입구에 도리이와 담장을 설치하고 도리이에 회원들의 이름을 새겼다. 1만8천여㎡(5천700평) 부지에 9채의 큰 건물이 있었던 대구 신사는 서울 신사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신사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달성공원에는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이란 큰 건물도 있었다. 지금의 테니스장 인근에 있던 건물로 이 역시 황국신민화를 위한 의식 교육장이었다.

대구 신사는 1946년 도리이가 먼저 철거됐으며, 신사 건물은 1966년 모두 철거됐다. 현재 달성공원 내에는 도리이 부재 외에도 신사, 관아 건물 등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 부재가 많이 산재해 있다.

글·사진= 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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