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갖다 붙이면 다 '고난의 서사'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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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27  |  수정 2024-05-27 06:58  |  발행일 2024-05-27 제23면

[월요칼럼] 갖다 붙이면 다 고난의 서사
이창호 논설위원

DJ(김대중)와 YS(김영삼).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이 두 사람보다 더 극적인 '고난의 서사(敍事)'를 가졌던 이가 있을까. DJ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최대 라이벌로 떠오른 뒤 운명과도 같은 고난의 길을 걸었다. 유신 반대에 나선 그는 1973년 일본에서 중정 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뒤 피살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선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YS는 3선 개헌 반대에 앞장서던 1969년 자택 부근에서 유독물질 테러를 당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그의 명언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기념비적 레토릭으로 남아 있다. 적어도 이 둘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이설을 달 수 없는 고난의 아이콘이었다. '고난 없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은 바로 그들로부터 시작됐다.

작금 정치판에서도 고난의 서사가 없을라고. 근데 유감스럽게도 왜곡돼 있다. 엄연한 사법 리스크가 수난사(受難史)로 치환되고 있는 것. "조국 전 장관이 모진 역경(고난)을 이겨낸 영웅으로서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다." 2년 전 신평 변호사가 한 이 말은 결국 현실이 됐다. 조 전 장관은 지난달 총선에서 12석을 따낸 원내 제 3당의 대표가 돼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풀 죽어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종횡무진 거침없다. 호사가들은 그를 차기 대권주자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상당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한다. 내로남불의 화신인 그가 '민의의 대변자'가 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오십보백보다. 숱한 사법 리스크 속에서 끊임없이 '고난의 정치인'임을 강변한다. 당내 측근은 그의 처지를 DJ의 고난과 동급으로 여길 정도다. 가당치도 않다. 군사독재에 맞서다 모진 탄압을 받은 DJ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고난의 서사는 국민이 수긍해야 성립된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도 정치인의 '고난 코스프레'가 먹히는 덴 이유가 있다. '팬덤(Fandom·특정 인물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무리)'이라는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령 이 대표나 조 대표가 어떤 명백한 잘못을 하더라도 이해하고 지지하겠다는 부류다. 시쳇말로 '웃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 DJ나 YS도 팬덤을 가졌다. 하지만 그땐 무조건적 지지가 아닌 '비판적 지지'였다. 그게 이치에 맞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맹목적 팬덤의 정치문화는 진영논리에 따른 분열과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팔 뿐이다. '우리 말고 모두가 괴물'이라는 혐오가 퍼진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는 황제적 1인 보스정치를 고착화하는 숙주가 될 수도 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팬덤에 기반을 둔 정치인이다. 지금 그를 겨냥한 당 안팎의 공격이 만만치 않다. 팬덤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팬덤 정치의 공식에 비춰 '맞으면 맞을수록' 그의 지지율은 올라갈 게 뻔하다. 이른바 '한동훈표 고난의 서사'가 쓰여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팬덤이 빚어내는 '고난의 서사'는 한국 정치의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쓴소리 하나 하겠다. 한 전 위원장은 스스로 팬덤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그걸 못하면 '민심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이는 이 대표와 조 대표도 무겁게 새겨야 한다.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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