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북 무안의 매창공원에 있는 이매창 묘. 부근에 매창의 시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다. |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기생이자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이매창(1573~1610). 그녀는 평소 "나는 거문고와 시가 정말 좋아요. 이후에 내가 죽으면 거문고를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와 함께 무덤까지 가기를 원할 정도로 거문고를 사랑했던 그녀. 매창은 수많은 시(한시)를 지었는데, 작품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도 거문고(琴)일 것이다.
◆거문고·시를 사랑한 이매창
이매창은 전북 부안(扶安)의 기생이었다.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桂生·癸生), 계랑(桂娘·癸娘) 등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매창은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지었다. 1573년 전북 부안현의 아전 이양종의 딸로 태어났다. 매창이 기생으로 살아간 것으로 보아 매창의 어머니는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한테 글을 배웠고 재능이 남달랐던지 한시에 뛰어나고 가무도 잘했다.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거문고가 선비의 반려였던 만큼 선비를 상대하는 당시 기생도 거문고를 익히는 것은 필수 과목이었을 것이다. 기생이 될 운명이었던 매창 역시 어릴 때부터 거문고를 배우게 되면서, 특별히 뛰어난 감수성과 재능 덕분에 거문고에 빨리 능하게 되고 거문고를 각별히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은 시 수백 편이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녀가 죽은 후 서서히 잊히고 사라져갔다. 그것을 안타까워한 부안의 아전들이 1668년 그녀가 남긴 시 58수를 구해 '매창집'을 간행, 지금도 이매창의 시가 전하고 있다.
매창은 스무 살 무렵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덕분에 멋진 시가 탄생하고 시와 함께 하는 거문고 연주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유희경은 천민 출신이지만, 의병에 참가하고 높은 벼슬을 지내며 사대부들과 교유했다. 당상관(가의대부)의 벼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그는 예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시에 능한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같은 천민 출신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주도하며 명성을 얻기도 했다.
자신보다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신분이 높지 않았던 유희경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은 둘 다 시에 능해 시로 교감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매창은 당시 그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유희경이 부안을 찾아와 매창을 처음 만났을 때 매창은 그가 서울의 시객(詩客)이라는 말을 듣고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누구신지요?" 라고 물었다고 한다. 매창과 유희경은 처음 만나면서 바로 사랑에 빠졌다. 이후 둘만의 사랑을 엮어갔다. 매창이 37세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간직한 연인은 오직 유희경뿐이었다.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은 주옥같은 절창(絶唱)들을 남긴다. 그들의 사랑과 그 여정에서 탄생한 시를 살펴본다.
◆사랑에 빠진 매창과 시인 유희경
1591년 따뜻한 봄날, 유희경은 부안에서 처음 매창의 얼굴을 보게 된다. 당시 유희경의 나이는 47세이고, 매창은 19세였다. 유희경은 소문으로만 듣던 매창도 만나볼 겸 봄날을 맞아 부안으로 여행을 갔다. 당시 매창은 시를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는 기생으로 서울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여항시인으로 유명했던 유희경의 명성도 높아 시를 좋아하고 본인도 시를 섰던 매창 역시 유희경을 알고 있었다. 매창은 유희경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중에서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유희경과 더불어 백대붕도 시를 잘 지어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희경은 자신이 촌은 유희경이라고 소개하고 매창에게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술잔을 들며 시와 거문고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서로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이날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정을 나누었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꿈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나 길게 가지는 못한다. 이듬해 봄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희경이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한양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이별하기 싫어서 다음 시 '자한(自恨)'을 짓는다. 그 중 일부다. '동풍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 이 좋은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잔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네// 마음속에 품은 정을 말하지 못하니/ 그저 꿈인 듯하고 바보가 된 듯하네/ 거문고로 강남곡을 타 보지만/ 이 심사를 묻는 사람이 없네'.
두 사람이 헤어진 지 16년이 흘렀다. 1607년에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당상관이 된 유희경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잠깐 내려왔던 모양이다. 이 때 매창의 나이 34세, 유희경은 62세였다. 노인이 된 유희경은 매창을 만나 열흘간 지내며 회포를 푼다. 이때 유희경은 매창에게 이런 시를 지어준다. 매창을 사랑하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는 '중봉계랑(重逢癸娘)'이란 시다. '옛날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 했는데/ 그대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던가/ 내 온 것은 임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요'. 유희경은 이 시 끝에 "내가 전주에 갔을 때 매창이 나에게 '열흘만 묵으면서 시를 논했으면 좋겠다'고 했기에 이렇게 쓴 것"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
매창도 옛일을 더듬으며 화답한다. '옛날을 생각하며(憶昔)'다. '임진년 계사년에 왜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을 누구에게 호소했으리/ 거문고 끼고 홀로 외로운 난새의 노래를 뜯으며/ 구슬픈 마음으로 삼청에 계실 그대를 생각했네'. 난새(鸞)는 전설 속 상상의 새로 봉황(鳳凰)과 비슷한 새를 가리키며, 삼청(三淸)은 신선의 세계를 말한다. 난새가 계빈이란 왕에게 잡혀 새장에 갇혔다. 왕은 난새가 노래하기를 기다렸으나 3년 동안 울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새장 앞에 거울을 걸어 바라보게 했다. 그러자 난새는 슬피 울기 시작했다. 결국 난새는 거울을 향해 달려들어 부딪혀 죽게 된다. 이 난새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 '고란곡(孤鸞曲)'이다.
유희경과 헤어진 3년 뒤인 1610년 여름, 그녀는 37세 나이로 쓸쓸히 죽는다. 그녀는 애지중지하던 거문고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매창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다. '도원에서 맹세할 땐 신선 같던 이 몸이/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볼까/ 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풍진 세상 시비 많아 괴로움의 바다인가/ 깊은 규방 밤은 길어 몇 해인 듯하구나/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 보니/ 구름 덮인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공동묘지에 그녀가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