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 권응상
  • |
  • 입력 2025-05-09 08:05  |  발행일 2025-05-09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하코다테 시가지를 다니는 노면 전차. 노선 대로를 따라 은행과 대형 상점들이 늘어섰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하코다테 산 전망에서 바라본 '명품' 야경. 고베, 나가사키와 함께 일본 3대 야경으로 꼽힌다.

고료가쿠 타워의 전망보다 더 유명한 것이 하코다테 산에서 바라보는 야경이다. 고베, 나가사키와 함께 일본 3대 야경으로 꼽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출처 불명의 '세계 3대 야경'이라는 말도 돌아다닌다. 1957년 '신일본100경(新日本百景)'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니 영 빈말은 아니다. 하코다테 산은 해발 334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바다에 접하여 단연 우뚝하다. 산 위의 전망대까지 한꺼번에 125명을 실어 나르는 대형 케이블카를 설치해 놓았다. 그만큼 관광객들이 많다는 뜻이다. 인상적인 것은 산에 여러 개의 기둥을 박는 대신 기슭과 정상을 직접 연결하는 로프웨이 방식이라는 것이다.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케이블카는 3분 만에 정상에 도달했다.

바다를 향한 전망대는 시가지와 항만을 감싸듯 품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며 하나둘 불이 들어오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야경이 펼쳐졌다. 반원형의 두 항만이 선명한 불빛 고리를 만들었고, 해안도로의 불빛은 큰 테두리를 형성하며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시선을 보내는 전망대와 풍경을 연출하는 공간이 하나인 듯 가깝게 느껴졌고, 항구와 바다는 그 배경처럼 낭만적이고 아련하다. 특히 부채꼴 모양의 항구 불빛은 갖은 형상을 만들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겹쳐진 모양이 마치 샤넬 로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명품 야경이라 부를 만했다.

반원형의 두 항만 품은 독특한 지형

고베·나가사키와 함께 손꼽히는 풍경

영화 '러브레터' 촬영지 하치만자카

눈 쌓인 언덕길 곳곳에 관광객 넘쳐

골목마다 이국적인 근대 건축물 빼곡

해변 따라 늘어선 붉은벽돌창고 장관

교역항으로 번성했던 시절 모습 남아

하코다테의 명품 야경은 독특한 지형 덕분인데, 또 항구로서도 천혜의 조건이 됐다. 개항 이후 이 항을 통해 다양한 외국의 문화와 물건이 유입되어 하코다테는 일본 근대화의 선봉이 됐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최초' 타이틀을 가진 것들이 많다. 앞서 언급한 고료가쿠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성곽이며, 하코다테 공원은 1879년 당시 영국 영사였던 유스덴의 제안으로 조성된 일본 최초의 도시공원이다. 또 일본에서 가장 먼저 기상 관측이 시작된 곳이자 일본 최초로 일본인이 설계한 상수도가 설치된 곳이다. 1872년 8월 26일에 온도계를 이용한 관측이 시작됐고, 1889년 일본 기술로 만든 상수도도 설치됐다. 이보다 2년 앞서 요코하마에 영국 기술로 시공한 상수도가 최초로 개설됐지만 일본 기술로 만든 것은 하코다테가 최초이다. 그 외에도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전신주, 일본 최초의 스토브, 일본 최초의 은판 사진, 일본 최초의 소시지, 일본 최초의 상선 하코다테마루(箱館丸), 세계에서 가장 긴 세이칸 해저터널 등 이 도시에는 최상급 수식어가 붙는 것이 많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일본 최초로 소시지를 만든 칼 레이몬 박물관 겸 가게. 소시지는 삿포로 맥주와 함께 일본의 서구문화 유입을 상징한다.

이러한 서양 문물의 유입은 개항 4년 뒤인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화됐다. 다양한 서구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외국인 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도시의 풍경도 급격하게 달라졌다. 시가 중심지인 모토마치 일대에는 기독교계 여학교와 교회 등 서양식 건물이 세워졌고, 모토이자카(基坂)에는 경찰서, 구청, 세관이 들어섰다. 지금도 운행되는 노면 전차 노선 대로를 따라 은행과 대형 상점들이 늘어섰다.

하코다테에 언덕길이 많은 것도 당시 항만과 하코다테 산 사이의 언덕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모토마치에는 18개의 언덕, 즉 '자카(坂)'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하치만자카(八幡坂)'이다. 이 언덕길은 우리나라에서도 흥행했던 영화 '러브레터'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하치만구(八幡宮)'라는 신사가 이 언덕길 위쪽으로 옮겨오면서 길 이름이 '하치만자카'로 바뀌었다. 이 신사는 1878년에 불에 타서 다른 동네로 옮겼고, 지금은 그 이름만 남았다. 눈이 쌓인 언덕길 곳곳에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붐볐다. 이곳이 포토스팟이 된 것에는 영화의 유명세도 있지만 일직선으로 바라보이는 항구와 배들이 뚜렷한 원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덕과 항구 사이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노면 전차까지 한 프레임에 담으면 그야말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치만자카와 함께 모토마치의 중심을 이루는 언덕이 모토이자카이다. 모토마치 공원과 연결되는 이 언덕 중간에는 개항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구 영국 영사관'이 있다. 개항 당시 지어져서 1934년까지 사용됐고, 지금은 박물관 겸 카페로 운영 중이다. 2층 전시실에는 개항의 역사와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해놓았다. 그 가운데 '하이카라(ハイカラ)'의 유래가 재밌다. 일본인 가운데 서양 사람의 깃 높은 와이셔츠(high collar)를 따라 입는 사람들을 비웃던 표현이다. 그러다 고급문화를 즐기는 멋쟁이 계층을 부러워하는 의미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하코다테 공회당. 1907년 대화재로 1만2천채의 집이 불탔을 때 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지은 회관이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러시아가 세운 하리스토스 정교회 회당. 하코다테의 근대 건축물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언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공회당(公会堂)이다. 청회색의 외벽에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더한 이 건물은 1907년 대화재로 1만2천채의 집이 불탔을 때 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지은 회관이다. 소마 텟페이(相馬哲平)라는 상인이 거금을 희사해서 영국의 고전 건축양식인 콜로니얼 스타일의 2층 목조건물로 번듯하게 지어놨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의 궁전 같아 보였다.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기둥 문양과 영국산 벽지 등은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의 유럽에 대한 동경이 묻어있다. 건물만 멋진 게 아니다. 이곳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전망 역시 건물에 어울리는 장관을 연출해주었다.

공회당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으로 하코다테의 근대 건축물 거리가 시작된다. 하코다테 산을 배경으로 늘어선 서양식 대형 건축물들은 개항지 특유의 이국적이고 독특한 분위기가 풍겼다. 특히 서로 다른 네 개의 종교 건축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장면은 하코다테에서 만난 가장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러시아가 지은 '하리스토스 정교회 회당(ハリストス正教会会堂)', 영국이 지은 '성공회 성요한 교회(聖公会ヨハネ教会)', 프랑스가 지은 '가톨릭 모토마치 성당(カトリク元町教会)', 일본 불교의 '진종 오타니파 하코다테 별원(眞宗大谷派函館別院)' 등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국가, 민족. 종교, 세대 등 나눌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나누어서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21세기 현재에 100년도 넘은 과거가 보여주는 이 공존과 화합의 장면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슬람 기도실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의 '해외교통사박물관'에서 보았던 불교와 기독교의 융합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존중하며 공존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착잡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아래 골목으로 들어서니 3층 목조건물 앞의 동상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 처음으로 소시지를 도입한 영국 상인 칼 레이몬(carl raymon)이었다. 이 건물은 그의 박물관이자 칼 레이몬 소시지를 파는 모토마치 본점이었다. 그제야 맥주집 메뉴판에서도 칼 레이몬 소시지 안주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소시지는 삿포로 맥주와 함께 일본의 서구문화 유입을 상징한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가네모리 회사의 수입품 창고 아카렌가. 1909년에 수입품 창고로 지은 일곱 채의 벽돌 건물이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하코다테 <하>

수입 물품을 팔던 가네모리(金森) 양물점(洋物店). 가네모리 회사의 모태가 된 가게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웅변하는 곳은 하코다테 항 일대에 수입품을 쌓아두기 위해 지은 '아카렌가' 창고이다. 아카렌가는 붉은(赤) 벽돌(煉瓦)이란 뜻이므로 '붉은 벽돌 창고'라고 번역해도 좋겠다. 이걸 지은 회사는 '가네모리(金森)'이다. 와타나베 쿠마시로(渡邉熊四郎)가 1869년부터 서양 물건을 파는 양품점으로 시작해서 일군 회사이다. 이름처럼 돈(金)이 숲(森)을 이룰 정도로 번성했고, 아카렌가는 1909년에 수입품 창고로 지은 일곱 채의 벽돌 건물이다. 지금은 리모델링을 거쳐 쇼핑몰로 탈바꿈했다. 수십 개의 상점이 입점해 있어서 한 건물씩 옮겨 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하코다테에는 먹거리도 많다. 메이지 초부터 내려온 이곳의 시오라멘(소금라면)은 삿포로 미소라면, 아사히카와 간장라면과 더불어 홋카이도의 3대 라면으로 유명하다. 담백하게 소금 간을 한 맑은 국물이 특징이다. 바닷가답게 해물덮밥 카이센동이나 오징어 소면 등도 유명하다. 또 하코다테에서만 먹을 수 있는 '럭키 피에로(Lucky Pierrot)' 햄버거도 빼놓을 수 없다. 럭키 피에로는 1987년 중국계 오이치로(王一郞)가 창업했다. 하코다테 시내에만 20여 개의 분점이 있는데, 아카렌가 옆에도 분점이 있다. 이곳의 시그니처는 간장 베이스의 '차이니스 치킨버거'이다. 버거 외에도 카레나 오무라이스, 파스타 등도 있어서 패밀리 레스토랑 같다. 하세가와 스토어도 하코다테에만 있는 편의점이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꼬치구이 도시락 '야키토리 벤토'도 지나치면 섭섭한 하코다테만의 먹거리이다. 음식 역시 하코다테의 공존과 조화의 문화를 닮았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