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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순 할머니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소리 내 읽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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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순 할머니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
장옥순(86·달성군) 할머니는 요 며칠 뿌듯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지난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앞에 놓인 책을 바라봤다. 그 책은 바로 '채식주의자'였다. 그러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에 나도 쪼끔 보탰지!"라며 웃었다.
'채식주의자'는 장 할머니가 읽은 첫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두 번이나 완독했다. "처음 읽을 때는 여주인공과 형부 사이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 두 번째 읽으니 조금 더 상황이 보였어"라고 말씀하면서도, 자세히 말해달라고 조르자 "너무 깊이 들어가면 곤란해"라며 살짝 피하셨다.
장 할머니는 항상 소리 내어 책을 읽으신다. 할머니만의 방식인데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듣고 있으면 가끔 할머니의 읽는 소리가 잦아들곤 한다. 그건 바로 소리 내어 읽기 민망한 부분에 다다랐을 때다. 할머니의 마음속까지 담긴 생생한 독서 방식이다.
장 할머니의 독서 여정은 4년 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시작됐다. 지난 2020년, 그 해는 할머니의 평생 반려자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난리였던 5월, 제대로 된 문상객도 받지 못한 채 조촐하게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 할아버지가 떠나기 전까지 장 할머니는 며느리, 아내, 6남매의 엄마로 살다보니 '나'라는 자리가 없었다.
경북 고령에서 10명의 대식구를 챙기며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었다. 일흔이 넘어서야 딸기 농사를 놓으셨다. 평생을 엉덩이가 무거운 남편을 만나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남편을 기다리느라 가슴이 타들어 가셨다고 한다. 그런 남편과 늙어서라도 다정하게 살아보려 했지만, 그런 바람도 이루지 못한 채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떠난 후 할머니에게 비로소 '나'라는 자리가 생겼다. 꽃 키우고, 색칠공부 하고, 책 읽으며 그 자리를 채워갔다. 할머니의 첫 책은 셋째 딸이 구독해준 '좋은 생각'이란 월간 잡지였다. 그 후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김약국의 딸' '자전거 도둑'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엄마를 부탁해'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짠했어. 내가 다시 아이들을 키우는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사랑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 책을 읽은 후의 아쉬움을 전하셨다.
책이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니 "옛날엔 눈만 뜨면 챙겨야 할 식구와 일이 많아서 가만히 앉아 뭘 본다는 상상조차 못했지. 그런데 책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정이 돼"라고 했다. 또, 그는 "글이 주는 힘은 참으로 놀랍다"며 "글이 짧은 나를, 노벨문학상 작품을 읽은 할매로 만들어준 한강 작가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전했다.
글·사진=이명주시민기자 imps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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