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성은 영화평론가 |
1989년, '조훈현'(이병헌)은 중국에서 열린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다. 바둑강국으로 자부심이 높았던 일본과 바둑 종주국인 중국을 모두 꺾고 세계챔피언이 된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하며 인기를 얻는다. 어느 날, 전주 출신의 한 소년과 대국을 하다가 그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주까지 내려가 두 번째 대국을 한 후, 조훈현은 망설임 없이 그를 내제자로 들인다. 그렇게 어린 '이창호'(유아인)는 부모님을 떠나 조훈현의 집에서 생활하며 바둑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스승으로서 조훈현은 이창호가 행여 자만할까 칭찬보다 질책을 많이 하며 어린 이창호를 엄하게 훈육하고, 본래 패기와 자신감이 넘쳤던 이창호는 갈수록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스승을 이기고 싶다는 그의 강한 집념은 무쇠 같은 방패가 되어 결국 스승의 칼도 부러뜨리고 만다.
'승부'에는 빌런이 없다. 로맨스도 없다. 모든 상업영화에 한 번쯤은 등장하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장면도 없고, 사고를 당하거나 로또를 맞는 사람도 없다. 오직 두 사람의 관계 및 감정 변화에만 몰두할 뿐이다. 그것도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고, 중심 서사는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단 7글자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남다른 흡입력으로 관객들을 몰입시키며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한다. 배우의 힘과 밀도 있는 연출이 '승부'의 핵심이다. 조훈현역을 맡은 이병헌의 연기는 아직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는데 아무런 부담감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고 유연하다. 까마득한 후배이자 내제자에게 국수 타이틀까지 뺏기게 되는 조훈현의 복잡다단한 심리가 그의 눈빛과 표정뿐 아니라 자세와 손가락, 대사 한 마디에서도 섬세하게 표현된다. 특히 처음 이창호와 결승전에서 대국을 할 때, 궁지에 몰린 그가 내뱉는 '안되나?'라는 세 글자에는 당혹감과 절망, 일종의 공포까지 담겨 있는데, 그 순간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마치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조훈현의 정신적 충격을 그대로 전달한다. 배우와 연출의 합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영화가 끝나면 적잖이 바둑이 궁금해진다. 바둑판이라는 반듯한 전장(戰場)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영화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