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윤일현의 ‘밥상과 책상 사이’…차기 정부에 바란다

  • 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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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26 06:37  |  수정 2025-06-08 17:47  |  발행일 2025-06-08
차기 정부에 바란다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엄마는 누구 찍을 거야?"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마라. 네가 왜 그런데 관심 가지나. 네 할 일이나 잘해라." 버스 안에서 내 뒷좌석에 앉은 엄마와 아이의 대화다. 남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 아니고 들리니까 들었다. 아이가 중3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마침, 버스는 큰 네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확성기 소리가 버스 안까지 들어왔다. 때가 때인 만큼 모자(母子)의 대화가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중3은 대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엄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왜 우리 부모님들은 중고교생 자녀들이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무관심하길 바라나.


중2 때 작문 선생님이 생각난다. 우리는 신문 사설을 노트에 베끼거나 오려 붙이고 읽은 소감을 간단히 적어 매주 검사를 받아야 했다. 아동 문학가이자 수필가인 김진태 선생님, 내가 교내 백일장에 장원했을 때 심사를 담당하신 분이다. 시상식이 있고 며칠 후 복도에서 선생님과 마주쳐 인사하니, 선생님께서 잠시 멈추시고는 "자네 상으로 받은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 참 좋은 책이야. 내가 그 책을 부상으로 골랐어."라며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다. 나는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 칭찬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던가. 나는 일요일이면 뒷산 소나무 아래나 집 근처 작은 저수지 둑에 앉아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우리 반 학생들은 신문 사설을 열심히 읽었다. 자연스럽게 정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신문은 세로쓰기였고 사설에는 한자가 섞여 있어 옥편을 곁에 두고 읽어야 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게 보약이었다. 중3이 누굴 대통령으로 뽑을까에 관심을 가지는 게 쓸데없는 짓이 된 세상이 과연 정상인가? 중고 시절 사회·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하도록 교육받으면 대학에 가서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성장기에 습득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분석 방법은 이후 삶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청소년기에 민주적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만 앞세우는 사람이 되기 쉽다. 어릴 때부터 토론 예절을 지키며 자기 견해를 말하는 방법과 타협과 양보를 배우고, 다수결로 결정된 것을 존중하는 훈련을 받아야 공동체 안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살 수 있다. 독일의 일부 유치원에서는 어린이 회의를 통해 놀이 시간에 할 것을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다툼이 생기면 교사가 중재는 하지만, 해결책은 그들 스스로 찾도록 유도한다. 핀란드 초등학교에서는 지역 사회 문제를 주제로 선정해 아이들이 직접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투표로 실행 방안을 결정하는 수업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민주주의란 나와 내 이웃의 삶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라는 감각을 일찍부터 체화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런 수업 시간이 있다. 얼마나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대로 시행하는지는 현장에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최근 '7세 고시'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7세 고시란 초등학교 입학 예정인 만 5~6세 아이들이 유명 영어학원 입학을 위해 치르는 시험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를 상대로 치는 시험 문제가 고교 수준이다. 수학도 비슷한 시험이 있다. 초등 2~3학년 학생이 유명 수학 심화 전문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고교 수준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살인적인 선행학습의 부작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어린 나이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경우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도를 넘는 선행학습은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UNICEF) 아동연구조사기관인 이노첸티 연구소는 최근에 선진국 아동·청소년의 복지 실태를 분석한 '예측 불가능한 세계, 아동의 건강'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아동·청소년의 기초학력 성취도는 선진국 중 으뜸이다. 그런데 신체 건강은 40개국 중 28위로 하위권, 정신 건강은 36개국 중 34위의 최하위권으로 분석됐다. 학업 성취도 지표와 가장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한국의 지표는 자살률이다. 최근 3년(2020∼2022)간 우리나라 15∼19세 청소년 10만 명당 자살률 평균은 10.3명으로 비교 대상 42개국 중 5위였다. 직전 조사 기간보다 수치가 크게 올랐다는 점도 보고서는 지적했다. 새 정부가 중시하는 국정 과제가 많을 것이다. 아동·청소년 교육 문제의 심각한 상황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민주시민 훈련 프로그램, 과도한 선행학습의 폐해,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 등이 후 순위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국가의 장래가 달린 아동·청소년 문제보다 더 시급한 현안이 어디 있겠는가.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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