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곧 장마가 시작되리라

  •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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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7-14 06:00  |  발행일 2025-07-13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장마가 시작되면, 나는 늘 북성로 골목을 떠올린다. 기온이나 강수량으로 환산되지 않는 어떤 '감각의 기억'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날씨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빚어내는 하늘의 도공(陶工)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은 '날씨의 맛'에서 날씨는 인간의 감정을 형성하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적인 감각의 문법이라 말한다. 그는 비의 냄새, 흙의 감촉, 공기의 습도로 기억을 복원한다. 나 또한 묻어두었던 여름비 하나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북성로 대구은행 근처에서 부품 가게를 하셨다. 기름 냄새를 풍기며, 볼트와 너트 같은 단단한 금속 조각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하시던 아버지. 가게엔 고작 남자 직원에다 경리 언니 한 사람이 전부. 가끔은 다방 아가씨가 차배달을 오가던 낯선 풍경의 이 공간을 초등학생인 나는 못내 부끄러워했다. 아버지는 그 골목에서 삼십 년을 버티셨다. 장마가 시작되고, 이내 숨 막히도록 더운 여름날이 계속되었다. 계절의 흔적은 아버지의 손과 부엌 한쪽에 걸린 하얀 수건에 고스란히 남았다.


어느 여름 저녁이었다. 엄마는 평소처럼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욕실이 아닌 부엌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옆에 걸린 하얀 수건에 대충 닦았다. 허기가 몰려온 듯 곧장 식탁으로 향하셨고, 엄마는 그 틈을 놓칠세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왜 또 부엌 수건에 손을 닦아요? 손은 왜 싱크대에서 대충 씻어요? 수건이 또 누렇게 됐잖아요, 며칠 전에 삶았는데..." 아버지는 별다른 대꾸 없이 식사를 하셨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그날은 어쩐지 목이 메고 가슴 한켠이 먹먹했다. 누렇게 물든 그 수건을 바라보는데, 하루종일 기름 묻은 공구를 만지며 일하신 당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수건에는 모든 것이 묻어 나온다. 비누칠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름때는, 가장에게 노동의 훈장이었고, 빛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여름의 기후였다.


코르뱅은 말한다. "삶은 위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감각들의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내게 아버지의 수건은 여름의 습기와 땀, 비와 기름 냄새가 응집된 하나의 계절이자, 한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감싼 작은 날씨였다. 장마철이 되면, 아버지의 가게는 더 깊이 기후에 민감했다. 북성로 점방에는 부품을 트럭에 바로 실어야 했기에 문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턱 없음'은 장마철엔 치명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이 골목을 타고 들이치면, 쌓아둔 공구들이 금세 녹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빗물을 막기 위해 온몸을 쓰고, 밤늦도록 젖은 바닥을 닦아내야 했다. 누구도 이를 두고 '날씨와 싸워 이긴 영웅의 이야기'라 부르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한 계절의 기록이었다.


지금의 북성로는 예전 같지 않다. 골목은 더 이상 금속의 진동이나 화물차의 굉음으로 북적이지 않는다. 한때 대구 경제의 한 축이었던 그 거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여름날의 풍경은 사라진 도시의 얼굴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마에 맺힌 경험의 방울들이다.


어쩌면, 날씨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잊히지 않는 것.


이야기되지 않았지만, 몸에 남아 있는 것.


"비는 가장 중요한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다."(윌리엄 길핀) 그렇게 숨기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비. 비 오는 날이면, 아직도 그 수건이 부엌 한켠에 걸려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여름은 그렇게 흘러갔고, 누군가의 수건은 또 그렇게 사라졌다. 곧 장마가 시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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