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의 친일행각...일본에 지역상권 넘겨주려해

  • 입력 1996-08-13 00:00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소문난 박중양은 대구군수 및 경북관찰사, 중
추원 참의를 지낸 7대 친일파의 한사람으로 49년 1월 반민특위에 의해 구
속돼 조사를 받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04년 러.일전쟁때 일본군의 고등통역관으로 참전해 일본이 승리하는데
기여한 박중양은 대구군수로 있을때 고종황제의 명을 어기고 지역상권을
일본상인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대구 성벽을 허문 장본인이다.

당시 대구는 성곽을 경계로 상권이 나누어져 있었고 성내의 상권은 조선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어 일본상권이 들어오지 못했는데, 일본상인의 요구
로 박중양이 성곽을 허물면서 지역상권은 일본인에게로 넘어갔다.

3.1운동때 박중양은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해 만세운동의 탄압에 스
스로 앞장섰으며, 41년 총독부 자문단체인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43년에
는 중추원 부의장을 맡았다. 43년에는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순회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만들었다.

49년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이 반민족 부일행위의 죄목으로 박중양을 연행
하러 갔을때 박중양은 그때까지도 히로히토 일왕의 사진을 안방에 모셔놓
고 있었다고 한다.

'박작대기'로도 유명한 박중양이 대표적인 친일파인데도 지역에서는 '가
난한 사람을 도와준 의인' '일본 경찰을 혼내준 민족주의자'로까지 미화되
고 있기도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역 사학자들은 말한다.

지역사학자들은 "경기도가 고향인 박중양이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일
본 정계실력자들과의 교분을 강화화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인
대구가 적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면서 "광복후에 쓴 그의 일기에도 자
신의 친일행각을 미화하는 글을 쓸만큼 대표적인 친일파" 라고 말했다.

침산공원 제1봉 꼭대기에 마치 대구시를 바라보듯 서 있는 일소대는 해
방전인 43년 박중양이 자신의 친일행각을 미화하기 위해 스스로 세운 기념
비로, 공원이 마치 일소대 주변을 꾸민 것처럼 보여, 시민들의 철거요구가
있어왔다.

침산공원은 원래 박중양 후손의 명의로 돼 있었으나, 대구시가 공원화하
기 위해 땅을 매입하면서 일소대는 보존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소대 주변 침산공원에는 아직까지 시가30억 정도의 후손 땅이 있으며,
일소대 뒤편에는 이장된 박중량의 선조묘가 몇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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