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둥에 걸린 법문 .5] 영남치영아문

  • 입력 2003-06-12 00:00

古壇松樹半無枝(고단송수반무지) 深洞石幢微有字(심동석당미유자) 淸梵消聲閉 竹房(청범소성폐죽방) 碧紗凝焰開金像(벽사응염개금상) 細艸筍香小洞幽(세초순향소 동유) 疎松影落空壇靜(소송영락공단정). (오래된 기단의 소나무 반쯤 가지가 삭았고, 깊숙한 골짜기에 돌 당간 희미한 글자 남았네. 맑은 범종 소리 그칠 때 죽방문 닫히고, 푸른 휘장에 햇빛 어릴 때 부처님 모습 열리네. 어린 풀 죽순 향기 작은 골짜기 그윽하고, 성긴 소나무 그림자 드리운 텅 빈 기단은 고요하네.)

‘영남치영아문’이라는 이색적인 편액은 봉서루 뒤편에 대웅전을 향해 걸려 있다. 이 편액에서 ‘치영(緇營)’이란 조선시대 승려로 이루어진 군영 (軍營)이며, 아문(牙門)은 군인들이 주둔하는 경내(境內)이다. 이러한 유물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 휘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원판은 동화사의 유서를 말해주는 보물이기 때문에 통일대불전 아래 성 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판이 걸린 자리에는 모각한 편액을 걸어 두었 으나, 모각한 편액이 원판보다 운치가 덜한 편이다.

편액의 글씨는 해서에 가까운 행서체이며, ‘을축년 초겨울 달성후인(達 城后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달성후인이 누구인지는 불확실하다. 기둥에 걸린 주련 글씨체는 강경(剛勁)한 추사 글씨풍의 행서체이다. 글 씨의 풍격으로 보아 한때 동화사에서 유숙하며 글씨를 연마한 적이 있는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선생이 아닐까 한다.

선생의 유품을 모아 둔 ‘석재 서병오 시서화집’(대구화랑 김항회 편, 이화출판사 간행)을 살펴보면, 석재 선생은 추사 선생의 글씨 풍격과 중 국 당대 서예가인 안진경의 서풍(書風)을 익혀서 독자적인 필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곳의 주련은 대웅전의 주련과 필체가 같으며, 매우 격조 높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전일주<영남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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