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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이 서 있는 국도 왼편의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금세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의 전경이 펼쳐진다. 마을입구에는 100년은 족히 넘을 소나무 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윗신계와 아랫신계, 뒷마을 등 세 개의 마을이 합쳐진 신계리에는 인천 이씨를 비롯 김해김씨, 경주김씨, 월성이씨 등 네 집안의 200가구 600여명 의 주민이 살고 있다.
토함산에서 발원하는 맑은 물과 청정한 공기 탓에 80세를 넘긴 노인들 이 45명이나 되는 장수마을이다. 대부분 논·밭농사로 중류생활을 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55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이씨가 50여가구쯤 산다. 이들은 세 마을 가운데 뒷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마을에 인천이씨가 거주하게 된 역사적인 내력을 아는 이 는 드물다. 조선 초기 함길도 도절제사로 재직 중 수양대군의 단종폐위에 반기를 든 뒤 여진족의 추대로 대금제국을 건국하는 등 풍운의 시대를 살 다 숨진 충강공 이징옥 장군이 이들의 선조인 탓에 한동안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고초를 후손들 말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1399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7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태종 16년인 1 416년에 부거책장 수비대장을 역임하고 경상도 도절제사와 평안도 도절제사, 판중추원사 등을 거쳐 문종 2년엔 사군육진 개척 때의 용맹으로 여진족의 추앙을 받든 이징옥 장군이 비극적인 생을 마칠 당시 셋째 아들인 연원(淵源)만이 유모의 등에 업혀 경주로 피신, 집안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역사책에 이징옥의 난으로 기록된 사건이 그 발단이다. 당시 이징옥 장 군과 장남과 차남 등 일가족이 참변을 당했으나 당시 8세 어린 나이로 고 향인 경남 양산 큰집에 머물던 이 장군의 삼남인 연원은 유모에 의해 빼 돌려져 목숨을 구했다. 연원과 유모는 치술령을 넘어 산 설고 물 선 경주 의 이곳 토함산 아래 계곡옆 ‘섶을 치고 만든 동네’라는 뜻의 신계리로 숨어들어 본관을 초산(草山)으로, 이름을 태엽(台燁)으로 바꿔 다시 자손을 퍼뜨렸다.
그 뒤 자손이 번창하고 세월이 340여년이나 지난 정조 15년인 1791년에 야 장군의 충절이 인정받게 돼 충강이란 시호를 추증받았고 비로소 후손들 은 세상에 떳떳하게 신분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순조 12년인 1812년에 본관을 인천으로 환관시킨 이 장군의 후손들은 이같은 난관을 겪으면서 더 욱 단단한 가풍을 이어 나갔다고 자랑한다.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를 비롯해 이동한 세계일보 부사장, 이동근 경주향교 전교 등이 경주시 외동읍 신계 리 출신 충강공의 직계후손들이다.
오직 생명만을 보존키 위해 산넘고 물건너 온 이 장군의 직계손들은 5 50여년 동안 집안을 늘려 현재는 전국 곳곳에 1천여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 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50가구의 후손들은 지난 60년 이후 선조들이 마련 해 놓은 인근 괘릉리의 문중산 23ha 중 13ha를 팔아 장만한 4억5천만원으 로 그동안 제향소로 사용하던 경모재를 상신사로 고친 뒤 충강공의 묘를 대신하는 비석을 겸한 제단비를 세우고, 해마다 음력 3월에는 향중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강공의 후손들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아랫상신(아랫신계)에서 거주하다 임란 당시 뒷마을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토함산 주령의 남서편 인 뒷마을에 입주할 당시 심은 350년 된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입 증하듯 우람하다. 이 느티나무는 1982년부터 경주시 보호수로 지정됐으며 주 민들은 이곳에서 정월초에 동제를 지낸다.
경주지역에서도 장수마을로 불리는 이곳 신계리는 불국사에서 3㎞밖에 떨 어져 있지 않지만 도시속의 오지라고 불릴 정도로 교통사정이 좋지 않다. 경주시내와 신계리를 오가는 시내버스가 하루 4차례뿐이어서 겪는 불편이 크다. 이 때문에 경주시내로 볼일을 보러 가노라면 세 번씩이나 버스를 바꿔 타야 하는 일도 많다.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암 김응춘 장군의 후손인 김병기씨(66) 는 “이같은 불편 때문에 당국에 여러 번 교통편을 늘려 줄 것을 건의했 지만 반응이 없다”며 씁쓸해 했다. 김씨는 그러나 마을의 인심을 묻자 신이 난다는 듯 “김해김씨, 경주김 씨, 인천이씨, 경주이씨 등 네 성들이 수백년동안 어울려 살면서도 아직 큰 송사 하나 없이 지내고 있다”며 마을의 후덕한 인심을 자랑했다.
최근 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방치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지난 해부터 토지보상금이 지급되고 있는 경주∼감포간 국도 4호선의 우 회도로가 마을의 허리부분을 남북으로 가르면서 높다랗게 지나갈 예정이지만 정작 마을에서의 진입도로는 설계에 없는 것. 이 때문에 주민들은 마을 가운데 전주에다 ‘진입도로를 개설하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당국에 항의하 고 있다.
주민을 대표하고 있는 충강공의 18세 종손인 이종열씨(61)는 “시류에 따라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그동안 교통불편을 겪던 마을에 진입도로는 제대 로 만들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글·사진= 손원조기자 wjson@yeongnam.com
*17세 종손 이종열씨
충강공 이징옥 장군의 18세 종손이자 입향조 연원공의 17세 종손인 종 열씨(61)는 “선조들은 충과 효를 삶의 근본으로 삼고 대대로 청백리로 생 활해 왔기 때문에 후손들도 이를 본받아 남의 귀감이 되는 생활을 해 나 가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며 가문의 가풍을 소개했다. 법무부 공무원으로 30년 넘게 재직하다 퇴직한 이씨는 “선조들의 유훈 이 본인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보답으로 살고 사회에 봉사하고 족친간 우의를 돈독하게 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에 충효정신을 제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광복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서당을 운영해 온 인천이씨 후손들은 전통예절 숭상정신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고 있어 각박해지는 현실 세계에서도 남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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