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혼 樓亭 .2] 안동 도산면 추월한수정

  • 입력 2006-06-19   |  발행일 2006-06-19 제28면   |  수정 2006-06-19
퇴계 이황의 숭고한 학문·혼 면면히…
조선 중기 문인 권두경이 후학에 가르침 전하려 세워
일제때 방화로 소실…전국 450여개 문중이 나서 중건
학생·일반인 대상 예절교육장 등으로 활용돼
[한국의 혼 樓亭 .2]  안동 도산면 추월한수정
추월한수정 전경

'공손히 생각하니 천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

이 글귀는 중국 남송의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중 한 구절이다. 1천500여년 후 공자의 도학(道學)을 다시 이은 주자가 공자의 마음,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하고 있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의 '추월한수'는 이 시의 한 구절인 '추월조한수'에서 온 말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의 도학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마음 또한 '추월조한수'와 같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퇴계의 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은 퇴계에 대해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상서로운 구름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항아리다"라고 표현했다. 성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이다.

#퇴계를 기려 지은 정자

안동시에서 봉화 방향으로 가다가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에 못 미쳐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토계리 상계(上溪)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야산을 등진 평탄한 지형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다. 정자 앞으로 토계(兎溪)가 흘러간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沖齋) 권벌의 5세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퇴계가 자라고 공부하며 은퇴 후 머문 곳을 찾아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정신과 소중한 가르침을 받들어 배우고, 또한 그 가르침을 영원히 후학들이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을 것이다.

창설재는 자신의 선조가 세운 봉화 닭실의 '한수정' 이름에 '추월'을 더해 '추월한수정'이라 명명했다. 또한 정자 안에 걸려 있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이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의 현판 이름도 창설재가 명명한 것이다. 추월한수정과 인접해 있는 퇴계종택의 명칭인'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이름도 창설재가 당시에 붙인 것이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라는 뜻이다. 산남궐리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강학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려온 것으로, 퇴계를 기리는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운재의 뜻은 창설재가 지은 시 '이운재'에 잘 나타나 있다.

'보갑에 든 옥거문고(寶匣瑤琴)/ 줄이 끊어진 지 오래이네(絃絶多年)/ 퇴계 선생이 멀리 이어(先生遠紹)/ 그쳐버린 거문고 소리 다시 전하였네(輟響再專)/ 경전을 대한 매화창에(黃卷梅窓)/ 봄소식이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幾回春信)/ 힘쓸지로다 후생들이여(勖哉後生)/ 오히려 여운을 다스려보세(尙理餘韻).'

거문고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성인의 도학이 이어지지 못한 것을 상징한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진시황 때 분서갱유로 단절돼 그 글만 복원돼 전해오다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송나라 때 정명도·정이천 형제가 공자의 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밝혀내게 되었고, 남송 때 주자가 집대성함으로써 공자의 도학이 새롭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정주학이라 불렀다. 고려 충렬왕때 회헌(晦軒) 안향에 의해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200년이 지난 뒤 퇴계에 이르러 정주학이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을 창설재는 퇴계가 끊어진 거문고 소리를 다시 이었다고 비유하면서, 그 여운을 받아 다스리자는 뜻으로 이운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완패당에 관한 창설재의 시도 전한다.

#450여 문중이 중건한 현재 건물

창설재가 창건한 추월한수정은 안타깝게도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다 타버렸다.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단소(道南壇所:도남서원이 대원군 때 철폐되면서 성현을 모시기 위해 제단만 설치했을 때의 이름. 현재는 서원이 복원돼 있음)에서 추월한수정을 복원하자는 도회(道會)가 열린다.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정자를 포함해 정침과 사당을 완성했다.

지금 정자에 있는 '산남궐리 해동고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이 썼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의 제자인 홍락섭의 글씨다. 그리고 '도학연원방'은 퇴계의 15세 종손 이동은옹(98)의 숙부인 원대(圓臺) 이원태의 글씨다. '추월한수정'과 '퇴계선생구택'은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이 썼다. 모두 복원 이후에 다시 쓴 글씨들로 퇴계의 글씨를 보는 듯 단정하다.

추월한수정의 대들보는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볼 때 시제를 걸던 나무를 100여명의 인부가 운반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이동은옹이 들려줬다.

창설재가 창건한 정자건물은 사라졌지만, 후학들의 복원을 통해 퇴계의 가르침과 혼을 전하고자 했던 그 마음과 업적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갈암의 문인으로 유학에도 정통하고 시·서·화에 능했던 창설재는 퇴계의 언행을 모은 '퇴도언행통록'을 저술하고, '계문제자록'을 정리하기도 했다.

현재 추월한수정은 학생과 일반인들의 전통 예절교육이나 문중 모임의 장소 제청(祭廳)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퇴계의 차종손(16세 종손) 이근필씨(75)는 '도산서원 허시회(虛施會)'를 만들고 거경(居敬)대학 설립을 준비하는 등 퇴계의 정신과 가르침을 교육하고 보급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한국의 혼 樓亭 .2]  안동 도산면 추월한수정
한학자 이갑규씨와 추월한수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퇴계 15세 종손 이동은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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