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의 마지막 포장마차촌을 찾아](https://www.yeongnam.com/mnt/file/200702/20070208.14522892600000000.jpg) |
지난 5일 오후 7시 대구시 동구 신천동 동대구 동양고속버스터미널 서편 골목.
동대구역 포장마차촌으로 갔습니다. 그 언저리엔 기사식당·모텔이 많죠. 대낮에도 음침합니다. 가끔 승용차만 오갈 뿐 행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당수 업소가 공칠 것 같습니다. 이날 22군데 포장마차 중 11곳이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전 포장마차 스타일은 아닙니다. 정주형이기 때문에 천막 대신 가건물용 샌드위치 패널로 벽체를 세웠습니다. 그래도 다른 데 기업형 포장마차보다는 훨씬 작아 옛 기분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포장마차 삼미(三味)'를 아세요. 주인의 입담, 안주 싼 맛, 맛갈난 상호입니다. 특히 상호는 '추억의 아이콘'입니다. 옛날 정든집, 불꽃마차, 이판사판, 뽀식이, 귀빈집, 거창집, 의성집, 영애집, 연정집, 수연이네, 경산집, 마산 함안집, 안동집, 영천집, 옥희네, 7번가, 합천집, 열린집, 학사집, 목로집, 달구벌, 선산집.
여기가 어쩜 대구의 마지막 포장마차촌이 될 것 같습니다. 예전 동촌유원지, 수성못, 2000년대는 월성동 등지에 포장마차촌이 있었지만 다 사라지고 여기 한 곳만 남았습니다. 가장 리얼한 상호를 가진 한 집을 골랐습니다.
'이판사판'
저는 피씩 웃으면서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삶이 뭔지를 꿰고 있는 은씨 이모(보통 남자 손님들은 이모라고 부르죠)는 TV에 취해 있습니다. 이 골목의 탄생비화를 듣기 위해 3천원짜리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켜먹었습니다. 그녀는 90년대 중반까지는 장사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IMF 외환위기 직후부터 포장마차를 꾸려가는 게 너무너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혼자서 병든 남편과 4남매 뒷바라지를 했으니 정말 '장한 엄마상'을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상당수 사람들이 여기를 색시집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에 속상해 합니다. 이모는 오후 6시쯤 문을 열어 다음 날 오전 4시30분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고속버스 이용객이 격감하고, 음주단속까지 심해져 여기 오는 술꾼들도 확 줄었습니다. 특히 단골이던 택시 기사들까지 수입이 좋지 않아 이곳을 잘 기웃거리지 못합니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행인은 불과 6명. 저도 한숨이 나는데 주인들은 더 속이 타겠죠.
이 거리가 탄생한 건 1990년. 동구청이 동촌유원지, 동구시장 등 관내 무질서한 포장마차 문화를 정비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조성시켰습니다. 91년 4월엔 수성못 포장마차촌도 철퇴를 맞습니다. 이에 앞서 87년엔 전국노점상 연합회가 결성됩니다.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포장마차 시대도 끝이 납니다. 이곳도 막차탄 포장마차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만든 겁니다. 처음에는 이판사판·영애집·호돌이가 전을 폈습니다. 여기는 가스불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연탄불만 사용했습니다. 이 공간은 합법적이기 때문에 전기·수도료는 꼬박꼬박 내야 합니다. 물론 색시를 두고 장사를 못합니다. 연합회가 결성돼 있어 그런 업소는 당장 퇴출당합니다. 모두 50~70대 여사장이지만 연정집만은 청일점 사장.
여기 포장마차들은 '쌍둥이' 같습니다. 거의 서너 평 크기, 안주도 비슷합니다. 입구 왼쪽엔 어김없이 연탄화로와 구이용 석쇠가 놓여있습니다. 손님이 워낙 뜸해 주인들은 TV를 '상비약'처럼 갖고 있습니다. 초창기엔 천막형이었지만 도둑 때문에 덧문과 자물쇠를 달았습니다. 업소마다 연탄 보관용 캐비닛도 있습니다.
1만3천원만 있으면 소주 한 병에 안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안주값은 무조건 1만원선. 눈에 초점이 풀린 상태로 혼자 거기로 가면 절대 환영을 못받고 고성방가도 가능한 한 자제해야 된답니다. 세상이 많이 빡빡해졌죠. 세상이 변하니 낭만도 변해야죠. 디지털 시대 포장마차의 낭만의 기조는 '흥청댐'이 아니라 '차분함'인 것 같습니다. 기자도 조만간 친구들과 '대구의 마지막 낭만촌'으로 놀러갈 겁니다. 그때 일부러 노래를 몇 곡 불러볼 겁니다. 주인의 눈총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삶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저는 김광석·김현식을 콜합니다. 둘의 노래는 맛있죠. 김광석은 '슬픈 노래',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정도면 금세 몸이 가뿐해집니다. 목포에 있는 제 친구 아버지는 소주 한 병에'애수의 소야곡'이면 직방입니다. 고인이 된 두 가객은 소주를 무척 좋아했죠. 대구MBC 골든디스크를 진행하고 있는 DJ 이대희씨한테 들은 얘기 한 토막. 죽기 전 김광석은 대구 공연 마지막 날 염매시장 좌판에 앉아 부침개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자살로 삶을 마감했죠. 둘에겐 네온사인이 피를 철철 흘리는 퓨전스타일 술집은 '노 댕큐(No Thank you)'. 계란만한 백열전구가 달려 있는 포장마차가 딱이죠.
포장마차. 거기선 제발 밥을 찾지마세요. 그건 사족입니다. 공복에 소수 한 잔, 가락국수 한 그릇이 '기본 타수'입니다. 비밀 한 가지. 포장마차에는 막걸리가 없습니다. 소주보다 취급하기 어렵고 잘 상하기 때문이죠. 가락국수 위에 고춧가루, 어묵, 쑥갓, 채 썬 대파 등이 고명으로 올라갑니다. 이런데선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는 별로죠. 양은 냄비가 딱입니다. 아참, 동대구역 식당가에 있는 퓨전형 가락국수(3천원) 집에 가보세요. 냄비가 예술입니다.
포장마차 안에선 너와 내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죠. 얘기도 오고가고, 술잔도 오고가고…. 주인과 손님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그네 같은 분위기가 나는 상호가 많죠. 간판 대신 천막에 검정 페인트로 비뚤비뚤 적어놓아야 더 그럴 듯 합니다. 한 명이 노래를 부르면 박수를 보내는 옆 손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막이 펄럭거리고 찬 바람이 거미처럼 바닥을 기어다닙니다. 더러 바람맞은 남자의 술주정도 있지만 주당들은 개의치 않고 술을 마십니다. 잘난 것보다 못난 게 더 어울렸던 그 포장마차.
아,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포장마차에는 장사만 남고 '낭만과 추억'은 증발 중이네요.
1990년 태어난 대구시 동구 신천동 동대구 동양고속터미널 서편 골목의 동대구 포장마차촌. 현재 22개 업소가 모여 있다.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의 마지막 포장마차촌을 찾아](https://www.yeongnam.com/mnt/file/200702/20070208.14535813200000000.jpg) |
1990년 태어난 대구시 동구 신천동 동대구 동양고속터미널 서편 골목의 동대구 포장마차촌. 현재 22개 업소가 모여 있다. |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의 마지막 포장마차촌을 찾아](https://www.yeongnam.com/mnt/file/200702/20070209.010331509380001i2.jpg) |
1989년 수성못 포장마차촌 전경. 91년 일제히 철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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