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3일부터 2박3일간 대구의 세 식당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현지 실사단이 먹을 음식 때문입니다. 길조(수성구 한정식 전문)의 김정옥 대표(66)는 신선로, 왕새우 오색찜 등 김범일 시장이 엄선한 9가지 한식메뉴를 선보였고, 인터불고 호텔 양식부는 말린 흑돼지로 만든 하몽 등 9가지로 짜진 풀코스 정통 스페인 요리, 인터불고 호텔 내 중식당 동보성에선 전복·새우·오향장육·호두·소라·연어·해파리로 만든 6가지 냉채, 중국 찜요리의 정수인 '불도장' 등을 선보였습니다. 상당수 실사단원들은 대구의 다국적 음식 메뉴라인에 적이 감동했을 겁니다. 이제 대구 음식도 국제버전으로 비상하고 있습니다.
요즘 대구에 태국, 베트남, 인도, 파키스탄, 러시아 등 꽤 많은 외국 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 때문이겠죠. 특히 손보충 사장이 버티고 있는 연경반점의 '전가복'은 자랑할 만합니다. 취재차 서울 갔을 때 강남의 몇 군데 괜찮은 중식당에서 전가복을 먹어봤는데 연경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조건 서울타령만 합니다.
'대구 외국음식 유입사'를 알려면 대구에 들어온 첫 외국인을 알아야 합니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중국·일본 장수가 한국에 귀화합니다. 선조로부터 성(김해 김씨)을 받아 달성군 가창면 우록에서 세거지를 정한 김충선과 경상감영공원에 세거지를 정했다가 1601년 거기가 경상감영 터로 정해지는 바람에 계산동으로 옮겨 살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성의 좌장인 두사충입니다. 그들도 초기엔 고추장 못 잊는 한국인 심정이었을 겁니다. 1893년 일본 첩자인 히자즈키와 무로가 대구에 일본용품을 퍼트립니다.
미국 북장로회 소속 윌리엄 M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그해 4월22일 한약재 상들이 모인 약령시장 골목에서 전단을 나눠줍니다. 1897년 11월 제임스 E 애덤스 선교사(한국명 안의와) 부부, 같은해 12월25일 존슨 선교사가 지역 최초의 병원인 제중원(현 동산의료원)을 세웁니다. 김보록 신부도 1902년 계산 성당을 세웁니다. 이들이 대구에 양식을 처음 선보였겠죠. 일식의 경우 경부선 철도 개설 때 대구에 온 일본 기술자들을 위한 각종 요정을 통해 널리 보급됩니다. 중식의 경우 사업자 모문금이 본격적으로 퍼트립니다.
그는 1901년 5월 대구 천주교 본당 초대 주임사제 로버트 신부의 요청으로 중국인 건축기술자 26명과 요리사 2명을 데리고 계산성당을 짓기 위해 서울서 대구로 내려옵니다. 모문금은 붉은 벽돌을 많이 팔아 돈을 적잖이 벌어 일제 때 대구 첫 청요리집(중식당)인 '군방각'을 세웁니다. 군방각은 68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종로호텔(99년부터 센츄럴 관광호텔로 개명)이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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