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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골목 초입 염매시장 혼수·폐백음식 거리. |
100년전 대구입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됩니다. 대구역전이 뜹니다. 그 전만 해도 '대구 쇼핑 1번지'는 대구읍성의 정문이었던 남문(영남제일관·현재 대남한의원 자리) 앞 거리와 서문시장이었습니다. 특히 남문 앞 염매시장에서 계산성당으로 이어지는 뽕나무 골목 양편에는 난전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가 '대구탕(일명 경상도식 육개장)'의 발상지입니다. 약전골목을 찾는 전국의 약재상들까지 대구탕 맛을 입소문 냅니다. 자연 대구는 '국밥의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중앙파출소 서쪽에 청도관, 옛 만경관 남쪽 청도집, 동산파출소 옆 동산관과 시장관, 대신네거리 북측 모퉁이에 대구탕집 등이 유명했습니다.
일제 때 나온 잡지 '별건곤'도 대구가 '육개장의 고장'이란 사실을 밝혀놓았습니다. 화원유원지 맞은편 모래밭에서 자란 '다끼파'가 특히 국맛을 업시켰습니다. 대구탕은 서울로 올라가서 '서울식 육개장'으로 변합니다. 상당수 사람들은 서울이 육개장의 발상지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약전골목은 대구 최초의 일·중·한식의 격전지였습니다. 1893년 9월 상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스파이 히자즈키(膝付)와 무로(窒)는 대구의 첫 근대식 점방으로 불리는 무라이(村井) 상회를 염매시장 근처에 엽니다. 이들은 눈깔사탕(아메다마), 은단, 금계랍(학질 치료제) 등 일본에서 갖고 온 잡화류를 팝니다. 뒤이어 들어온 일식 조리사들이 오뎅, 화과자, 스시, 소바 등을 전파시킵니다.
뒤이어 중식당들도 약전골목과 맞물린 종로에 하나둘 등장합니다. 1903년쯤 한국에 온 모 사장은 1913년쯤 대구 대교구장 드망드 주교의 부름을 받고 동향 출신 건축 기술자 강의관(姜義寬) 등과 함께 대구에 옵니다. 그 때 대구 첫 중화요릿집(일명 청요릿집)인 군방각(群芳閣·주인 모문금)을 종로2가에 세웁니다. 군방각을 축으로 화교를 상대로 하는 잡화점 화상공회(華商公會·현 센츄럴관광호텔 주차장 자리), 인화당 한약방(현재 경미반점 자리), 대구화교소학교 등이 생깁니다. 군방각 전통은 옛 전매청 맞은편 기린원과 경북대 치대 동편 인화반점으로 옮겨가죠. 이어 복해반점, 경미반점, 영생덕 등 중화요릿집이 가세합니다. 특히 영생덕은 대구에서 호떡·공갈빵·계란빵 붐을 일으킵니다. 군방각은 60년대 후반 종로호텔(현 센츄럴관광호텔) 건립자인 진주 출신의 박종실(2003년 작고)에게 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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