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일의 다시 쓰는 한국풍수 .1] 서울市基(상)

  • 입력 2012-03-19   |  발행일 2012-03-19 제9면   |  수정 2012-10-30
전통 풍수·현대 지리학 절묘하게 조화 이룬 山河襟帶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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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시기(市基) 전경. 왼쪽 끝의 북한산 보현봉 지맥이 형제봉을 거쳐 주산인 백악(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보이며, 오른쪽으로는 옛 사대문 안 터와 안산이었던 남산이 보인다.

현재의 서울시기(市基)에 대해 두 가지 풍수 주장이 있다. 하나는 땅 기운이 소진됐으니 천도하자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것을 풍수 발복(發福)이라 여긴다. 필자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해석이 모두 마뜩잖다. 전자는 도시라면 모름지기 지표면이 거의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지기(地氣)의 상승이 막혀 버린다는 상식을 간과한 까닭이고, 후자는 자본과 경제 논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마천루를 마치 풍수 발복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서울시기의 어제와 오늘을 통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 즉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창조해 나가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전형적 得水局 명당에 국토 중앙
도읍터 선정과정은 지혜 그 자체
한양터 내부 ‘명기성’ 보존 위해
그린벨트격 ‘금산제’ 등 노력도

청계천 복원… 명당수 다시 흘러
대기오염엔 殺風이 오히려 생명풍
강변 건물 저층화로 바람길 열어야

조선왕조의 도읍터 선정 논의과정은 우리 조상의 번뜩이는 지혜 그 자체다. 한양 정도(定都) 직전에 조선 왕실은 계룡산에 새 도읍(新都) 공사를 1년여 강행한 적이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산태극수태극, 회룡고조형의 대길지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결사반대했다. 계룡산 일대가 아무리 명당일지라도 국토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팔도로부터의 거리도 균등하지 않을 뿐더러 뱃길이 열려 있지 않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래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옛 사대문안)과 무악(연희동·신촌동 일대)으로 한정시켜 현장 답사가 진행된다.

무악은 도읍터로는 명당판국이 좁고, 한양은 명당수가 부족하고 험한 돌산이 보기에 흉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풍수상 완전무결한 땅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삼게 된다.

현대 지리학은 한 도시가 지닌 입지적 특성을 site(절대적 위치)와 situation(관계적 위치)으로 개념화한다. 풍수지리의 산태극수태극 지세, 명당판국같은 것은 특정 장소가 지닌 내부적 속성 즉 site이고, 유학자들이 현대 인문지리학적 사고에서 주장한 국토의 중앙적 위치, 도리(道里) 균등, 뱃길같은 것은 특정 장소가 지닌 외부적 속성 즉 situation이다.

한양은 전형적인 득수국(得水局) 명당의 site를 지니고, 국토의 중앙 지점이라는 situation을 지닌 곳이었다. 15세기 초에 전통 풍수 이론과 현대 인문지리학적인 입지 요인을 그토록 절묘하게 조화시켜 도읍터를 결정한 민족은 아마도 우리 한민족이 유일할 것이다.

도읍터로 정해진 한양은 군데군데 흰색의 거대한 화강암 명산이 솟구쳐 있고, 또 그 산 지맥들이 옷깃처럼 팔을 벌리고 있다. 그 앞을 큰 한강이 띠처럼 둘렀으니 문자 그대로 산하금대(山河襟帶)의 땅이다. ‘택리지’에서도 “한양은 동으로는 북한강,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는 임진강이라는 큰 강이 둘렀고, 서쪽으로는 바다의 조수와 통한다. 백악(북악산)은 여러 강이 모여 서로 얽힌 사이에 위치하여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다. 한양은 지난 삼백 년간 명예와 문물을 떨친 지역이 되고, 유풍(儒風)이 크게 일어나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니 엄연히 하나의 소중화(小中華)를 이루었다"고 그 터를 극찬했다.

한양 터 내부의 명기성을 보존하려는 국가적 노력 또한 대단했다. 삼각산 보현봉 산줄기를 따라 동서남북의 10리를 경계로 하여 사산금표(四山禁標)를 세웠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그린벨트와 같은 개념으로서 벌목과 묘지 사용, 돌 캐기 등을 금하는 경계를 정한 구역이었다.

금산(禁山)제도는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지기를 온전히 도성 내로 유입시켜 국운을 번성케 한다는 주목적과, 가뭄과 홍수를 줄이고 도성다운 주변 경관을 조성한다는 부수적인 의도가 있었다. 이 제도를 어긴 자는 중벌로 다스려졌으며, 어쩌다 산 흙이 호우로 쓸려나가면 보토를 하여 땅기운이 쇠약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비보(裨補: 풍수상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하는 것)하곤 했다.

현재의 북악터널 정상이 보토현이라 불렸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어디 그뿐인가. 도성 안은 대부분 나지막한 단층집이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온 ‘양래음수(陽來陰受)’의 풍수원칙을 그대로 따른 때문이다. 높은 산이 많은 양(陽)적인 국토에서는 집을 낮게 음(陰)적으로 지어 궁극적으로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삶터를 만든다는 토지이용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도성 안 명당수 관리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명당수였던 개천(청계천)은 원래 북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내려온 여러 지류 하천의 맑은 물이 합쳐져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과 어우러진 뒤 한강에 이른 하천이었다. 큰비가 오면 이 골짝 저 골짝의 많은 돌과 모래가 쓸려내려 와 바닥에 쌓였지만, 재정상 때맞춰 준설공사를 하지 못해 걸핏하면 범람해서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곤 했다.

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500여 년 동안 큰 하천 준설공사는 100년 내지 200년에 한 번씩 행해진 게 고작인 반면 홍수 피해에 관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당시의 열악한 재정 여건과 보잘 것 없던 토목공사 기술을 감안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게다.

개천은 사실 홍수 위험 외에도 오염이라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북학의’(1778)에서 “도성 안의 모든 집이 더럽고 지저분한 것은 수레가 없어 그것을 성 밖으로 가져나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똥오줌을 날마다 뜰이나 거리에다 버리므로 개울의 교량이나 석축에는 인분이 더덕더덕 말라붙어서…"라고 쓰고, 또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에서 “도성 안 좁은 길 옆 수챗도랑에는 오물이 그득하여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 수챗도랑에는 반라의 어린아이와 옴이 오른 …"이라고 쓴 것을 보면 당시의 명당수 개천이 심하게 오염돼 있었으며, 그런 상태가 국초부터 구한말까지 아무런 대책 없이 방치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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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청계천의 모습. 패기(敗氣)로 가득 찬 거대도시 서울의 도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종의 비보(裨補)풍수 공간이다.


개천의 오염문제에 관한 진지한 논의는 구한말보다 450년이나 앞선 세종 26년(1444)에 이미 있었다. 집현전 수찬 이선로와 교리 어효첨이 벌인 명당수 오염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선로는 “개천이 너무 더러워 오물과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금하여 명당수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효첨은 “인구가 늘어난 도성에서 사람들이 쓰레기와 오물을 개천에 버리는 것은 불가피하며, 비가 내려 그 오물이 씻겨나간다 해도 명당수 자체는 결코 맑을 수 없다"고 하는 일종의 반(反)풍수론을 폈다.

세종은 이에 대해 “어효첨의 주장이 정직하다"하고 이선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 논쟁은 명당수 오염에 대한 풍수 논의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후로는 개천 오염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없었으며, 금산제도처럼 하천을 오염시킨 사람을 강력하게 처벌한 사례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세종이 이선로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당수 보호와 관련된 강력한 환경법을 제정했더라면 개천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오염된 채로 방치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도 청계천은 생활하수가 흘러들어 지저분하고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196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되고 만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지하에 묻혔다가 2005년에 드디어 맑은 물이 흐르는 명당수로 거듭 태어난다. 왕조시대에는 감히 객수(客水)인 한강물을 끌어 올려 주수(主水)인 개천에 통수(通水)시킬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인즉 경제력과 기술이 결국은 옛 도읍의 명당수를 훨씬 더 품격 있게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조선시대의 지맥(地脈) 비보정신이 지금의 명당수 비보정신으로 이어진 셈이다. 산책과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친수공간은 사람의 기분을 밝고 명랑하게 만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도시사회 생활에서 물은 그만큼 정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욱이 앞으로 그곳을 식물과 생물이 살아 있는 환경친화적 생태하천으로 가꿔 나가겠다는 시정(市政) 발표가 최근에 또 있었으니 한층 더 기대가 크다.



왕산에 올라 옛 한양도성 터를 내려다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사진으로 본 구한말의 나지막한 기와집과 초가집들의 잔상이, 고층빌딩이 밀집된 현재의 도심과 겹쳐 보인다. 그리고 ‘양래음수’의 고전적 풍수원칙과, 효율성과 경제성을 최고 목표로 삼는 현대의 토지관이 역시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랴. 인왕산에 오르기 전에 중심가를 다녀봤는데, 각종 배기가스와 분진 등으로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이미 썩은 패기(敗氣)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을. 왕조 때의 수질오염 문제가 지금의 대기오염 문제로 이어지고 있으니, 대자연이 제아무리 명당 터를 열어 줄지라도 사람의 논리가 그런 자연과의 합일을 포기해 버리면 명기성이 무너지는 것도 역시 시간문제인 모양이다.

1994년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울이 멕시코시티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이며, 시내에서도 광화문 일대의 오염도가 제일 높고 도심에서 먼 외곽지역으로 갈수록 오염도가 낮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일한 해결책은 바람길을 여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풍수에서는 바람으로 명당의 생기가 흩어지는 산기처(散氣處)를 가장 흉하게 여긴다. 그래서 예전에는 도성 북서쪽의 함몰된 지맥(자하문 고갯길)을 통해 유입된 겨울철 찬바람을 살풍(殺風)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바람이 오히려 생명풍이 되었다. 지상의 썩은 기는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여 성정(性情)을 흐리게 한다.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마실 요량이라면 바람을 가두는 장풍(藏風)보다는 오히려 생기 있는 바람을 끌어들이는 통풍(通風)이 지금의 서울시기에는 훨씬 더 절실하다. 산자락에 고층 건물을 지어 산풍이 평지로 불어내리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되며, 한강변을 따라 고층아파트를 긴 회랑처럼 도열해 지어 강바람이 그 벽에 부딪혀 강줄기를 따라 불게 해서도 안 된다.

강변의 건축물을 저층화해 생명풍이나 다름없는 강바람이 강북과 강남의 시가지 쪽으로 마음껏 불어갈 수 있도록 바람길을 터주어야 한다. 그 방법만이 공익(公益)풍수를 달성하는 동시에 서울이 세계적인 득수명당 도시로 거듭 태어나는 길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협찬=열경요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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