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24] 구성면 이숭원 초상화

  • 박현주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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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24   |  발행일 2013-09-24 제15면   |  수정 2013-09-24
그림과 문중 기록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現夢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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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위치한 경덕사에는 조선 성종대의 공신 이숭원의 초상화가 보관돼 있다. 1897년 후손인 학계 이규성이 경덕사를 지어 이숭원의 초상화와 위패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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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초상화는 노비 출신이자 조선 전기의 대화가인 이상좌가 그린 것으로 조선 초기의 회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감천이 굽이쳐 흐르는 김천시 구성면에는 후손의 꿈에 나타나 자신(초상화)의 딱한 처지를 알린 조선 전기의 문신 충간공(忠簡公) 이숭원(李崇元·1428~91)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우리나라의 설화(說話) 중에는 현몽(現夢 : 죽은 사람이나 신령 등이 꿈에 나타남)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지만, 구체적인 기록과 결과물이 남아있는 사례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이숭원 초상화의 경우 현몽과 관련한 이야기 구조이면서도 구체적인 문중의 기록과 함께 그림까지 온전히 남아있어 눈길이 간다. 마을 노인들의 옛날이야기가 마냥 허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또한 구성면 일원에는 유교의 성인 공자(孔子)와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 많아 학문을 숭상하는 향촌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감천 150리를 가다’ 24편은 우여곡절 끝에 후손의 품으로 돌아간 이숭원 초상화와, 공자를 흠모한 구성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1 공신(功臣) 이숭원 초상화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위치한 ‘사우(祠宇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집·사당)’ 경덕사에는 조선 성종(成宗 1457~94)대의 공신 초상화가 한 점 보관돼 있다. 상좌원리 마을 어귀에 있는 경덕사의 남쪽 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사찰의 산신각 규모의 영당(影堂)이 나온다. 이 영당에 1974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이숭원 초상화가 걸려 있다.

초상화에는 사모를 쓰고 의자에 앉아있는 단령(團領 :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 차림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얼굴을 약간 좌측으로 돌린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 전신교의상(全身交椅像)으로 비단 위에 그려졌다. 초상화를 그린 화공도 대단한 인물이다. 이숭원의 초상화를 그린 이는 노비 출신의 화가 이상좌(李上佐)로 조선전기의 대화가로 꼽힌다. 천한 노비 출신이면서도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이상좌는 중종의 도화서(圖畵署)에 특채됐다.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후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이숭원은 연안이씨(李氏) 가문의 인물로 1453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대사헌·한성판윤·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퇴한다. 그가 세상을 버리자 조정은 ‘충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종조 당시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군되기도 했다. 경덕사에 보관된 초상화는 공신에게 내려진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1471년(성종 2) 하사받은 것이다.



#2 자신의 처지를 알린 영혼

이숭원의 초상화가 상좌원리에 오기까지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그 출발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오봉(五峰) 이호민(李好民·1553~1634)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호민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에 주력, 조선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한 인물로 한양에서 살았다. 그 역시 이숭원과 같은 연안이씨 가문의 일원이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봉사한 이호민은 봉록을 받는 관리이자 신하로서 열심히 살았고,피곤함마저 잊고 지낼 정도로 늘 열정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랬던 것처럼 책을 뒤적이던 이호민에게 감당할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눈꺼풀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고, 그렇게 즐기던 독서마저 접은 채 잠에 빠져들고 만다.

이후 잠에 빠진 이호민의 눈앞에 점잖은 인상의 노인 한 명이 나타난다. 갓을 쓴 채 의관을 정제한 노인에게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노인은 이호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내가 곤경에 처해 있으니 나를 좀 도와달라”며 간곡한 부탁을 한다. 생면부지의 노인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 궁금해지던 찰나, 이호민은 잠에서 깼고 자신이 꿈을 꾸었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아침을 맞이한 이호민은 ‘별 희한한 꿈이 다 있구나’라며 지난 밤을 떠올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집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침부터 그의 집을 찾은 이는 이호민의 가문인 연안이씨 문중에서 온 사내였는데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 사내는 “가문의 큰 어른이자 성종대의 공신인 충관공 이숭원의 후손이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이숭원이 증손자를 보지 못한 탓에 더 이상 그의 후손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형편”이라며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이 말을 들은 이호민은 ‘내가 나서 자초지종을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비록 이숭원의 직계가 아닌 방계의 후손이지만, 가문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3 후손의 품에 안긴 초상화

이호민은 이숭원의 직계 혈육인 증손녀가 사는 집을 찾았다. 이호민을 만난 이숭원의 증손녀는 “할아버지를 잘 모시고 싶었지만 출가외인이 되어 집안 어른을 모시지 못했다”며 자신을 책망한다. 시댁의 제사를 모시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서 친정 할아버지를 챙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죄책감에 흐느끼던 이숭원의 증손녀를 어르고 달랜 이호민은 곧 이숭원의 영정(초상화)을 한 번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헛간의 먼지가 가득 쌓인 제기 상자 속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이숭원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호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상화의 얼굴이 자신이 꿈에서 본 노인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후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른이 나에게 찾아오셨구나…. 내가 이 어른을 모실 길을 찾아야겠다.”

이호민은 조상이 자신의 꿈에 현몽(現夢)했음을 뒤늦게 알았음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이호민은 이숭원과 가까운 문중의 친척들을 수소문한다. 다행히 이숭원과 가까운 연안이씨 가문의 후손이 경상도 지례현 상좌원(김천시 구성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호민은 상좌원으로 인편을 보내 조상의 초상화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함을 알린다. 이후 가문의 큰 어른이 현몽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상좌원의 연안이씨 집안 사람들은 마을의 장정들을 보내 이숭원의 초상화를 지례현(구성면)으로 모셔온다.

곧 이숭원 초상화는 지례현 도동서원에 모셔졌다. “할아버님,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초상화를 맞이한 후손들은 비단 위에 그려진 이숭원의 기품 있는 모습에 넋을 잃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편 이숭원의 초상화는 19세기 중반 서원철폐령으로 상좌원리의 충효당으로 옮겨졌다. 1897년 후손인 학계(鶴溪) 이규성(李圭性)이 경덕사를 지어 영정과 위패를 모시면서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됐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이숭원 초상화의 경우 임진왜란(1592년) 이전의 회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참고 문헌= ‘김천시사’
 송기동 저 ‘김천의 마을과 전설’
공동 기획 : 김천시

공자동·백어동·벽계동… 성현을 흠모한 고장 구성면
<孔子洞><伯魚洞><碧溪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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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의 지류인 구성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의 이름을 딴 공자동에 도착할 수 있다. 공자동 이외에도 김천시 구성·대항면 일원에는 유교와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 많다.



김천시 구성면 일원에는 유교의 성현과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 많다. 공자의 이름을 딴 ‘공자동(孔子洞)’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공자동은 김천시 대항면의 영역이지만 구성면과 생활권을 같이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지례현으로 묶인 하나의 행정단위였다.

유교적 이상향에 특화된 지명유래는 조선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초 김천시 부항면 출신의 병마사 이회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공자의 화상을 얻어온다. 그는 퇴직 후 공자동으로 낙향했는데, 공자의 화상을 자신의 집에 소중히 가져다 모신다. 이후 공자의 화상 덕분에 마을의 이름은 공자동으로 불리게 됐고, 주변의 지명들도 유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바뀌게 된다.

백두대간 황악산 줄기인 바람재 아래 구성천 물길 주변에 유교 관련 지명이 집중되어 있다. 감천과 합류하는 구성천 물길을 거슬러 상좌원리를 지나면 도동서원이 위치한 ‘도동(道洞)’마을이 나온다. 유교 성현의 말씀을 듣고 도를 깨우친다 하여 ‘들은들’ 혹은 ‘문도동’이라 칭한다. 이외에도 유교 성인들의 덕을 밝힌다는 의미의 ‘명덕(明德)’, 공자 아들의 이름을 딴 ‘백어(伯魚)’, 선비들의 맑은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의 ‘벽계(碧溪)’ 등의 지명이 눈길을 끈다.

한편 1662년(현종 3) 이석유·김덕호 등의 선비들이 ‘공자의 소중한 화상을 사가에 모시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공자화상을 지례향교로 옮겨 봉안했다. 하지만 지례향교의 공자화상은 1978년 도난당했고, 현재 지례향교의 공자화상은 다시 제작된 것이다.

글=박현주기자·임훈기자/사진=박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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