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때 귀화한 왜장 ‘사야가 김충선’과 ‘사여모 김성인’의 엇갈린 운명

  • 박진관
  • |
  • 입력 2013-11-29   |  발행일 2013-11-29 제35면   |  수정 2013-11-29
대구와 청도 속의 ‘작은 韓日평화’ 흔적들
20131129
김성인의 후손인 김해주 함박김씨 전 종친회장(왼쪽)과 김충선의 후손인 김상보 사성김해김씨 종친회장이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 김해주씨 댁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31129
청도군 각남면 함박리 주머니골에 있는 김성인의 묘소.
20131129
녹동서원
20131129
김성인이 받은 교지.
20131129
한일우호관 전시관 내부
20131129
한일우호관 전시관 내부
20131129
한일우호관을 찾은 일본인이 한복을 입고 차를 마시고 있다.



■ 청도 각남 함박리 김성인

◆사여모 김성인

김시민 휘하서 戰功
북방 국경수비도 자원
광해군이 성·이름 하사
자손 귀해 현재 20가구
재실 하나 못세웠지만
교지 목숨 걸고 지켜

김충선은 널리 알려졌지만 또 다른 항왜인 사여모 김성인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해김씨 향화(向化)공파보에 따르면 사여모(沙汝某)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좌부장이었다. 사여모는 가토의 우선봉장 김충선, 부장 김계충과 함께 임진년 여름 4월13일에 조선에 귀화했다. 우선봉 김충선이 경상도병사 박진에게 강화를 청할 때 사여모는 방어사 김시민 장군 휘하로 들어가 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고 나와 있다.

이에 김시민이 선조에게 사여모의 활약을 알리자 선조가 벼슬을 내렸다. 왜란이 평정된 후 광해군 때 북방 국경 수비를 자원해 여러 공을 세운 뒤 광해군이 그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종 2품)를 제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북방 국경에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항왜 8천~1만명을 배치했다고 나와 있다.

사여모는 북방의 경계가 허술함을 들어 광해군에게 상소해 이를 고치게 했다. 그 공으로 광해군이 직접 그를 불러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고 김성인(金誠仁)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에도 북방에서 잇따라 공을 세우자 광해군은 가의대부, 자헌대부(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와 함께 종군한 아들 귀성(貴成) 역시 어모장군(정2품)과 절충장군을 받았다.

이괄의 난 때도 김성인은 김충선의 부하로 이괄의 오른팔이었던 서아지의 수급을 베었다.

김충선의 모하당문집 부록에 따르면 김성인이 그의 아들 귀성, 훈련원첨사 김계수와 함께 김충선의 부하로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전투(현 경기도 광주시 소재)에 참전해 청나라 군사와 전투를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모하당문집 부록에 따로 김성인을 소개한 것은 김충선이 김성인을 특별히 아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해김씨 향화공파보 내용 가운데 김성인의 증손자 득추(得秋)가 쓴 행장에는 쌍령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이 김성인이 아니라 김구인(金九仁)으로 나와 있다.

◆김성인의 후손을 만나다

김성인(사여모)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향화공파는 현재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에 4가구가 집거해 있다. 나머지는 대구와 부산, 달성군 가창면 등지로 흩어졌다. 총 가구 수는 20호 남짓하다.

김성인과 그의 아들 귀성의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전투에서 전사했을 수도 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1995년에 쓴 가보에는 김성인이 전사하지 않고 도주(청도의 옛 이름) 화악산 아래 함박촌에 복거했다고 나와 있다.

김성인을 시조로 하는 일족은 스스로를 함박김씨라고 한다. 함박리는 청도군 각남면에 있다. 바로 옆에 사리(沙里)가 있는 것으로 봐 사리 역시 사여모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싸리가 많아 사리로 됐다’는 지명유래설이 있으나 김성인의 묘소가 사리(지금은 함박리로 주머니골로 바뀜)에 있는 것으로 봐 마을 이름도 사여모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함박김씨 전 종친회장이자 김성인의 10세손인 김해주씨(74)는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준 교지(敎旨·임금이 벼슬아치에게 주던 명령서)를 목숨을 걸고 지켰다.

“40년 전 한 사기꾼이 교지를 빼앗아가기 위해 나를 간첩으로 몰기도 했습니다. 당시 3천만원을 줄 테니 팔라고 윽박지르기도 했지요. 하지만 대대로 이어온 가보를 어찌 남한테 함부로 주겠습니까.”

함박김씨는 5대까지 독자로 세계(世系)를 이어오는 등 자손이 귀했다. 게다가 궁벽한 산골에 집거하다 보니 가계가 번창하지 못했다. 흔한 재실(齋室) 하나 건립하지 못하고 조상의 문집 또한 발간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달성의 우록김씨 후손이 상대적으로 흥성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김 전 종친회장은 “5대조까지 산소는 대부분 함박리와 사리에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할아버지가 ‘본성을 찾았다’는 농담을 하곤 했답니다. 우리 일족은 대대로 인근 우록김씨와는 교류를 했습니다. 어쨌든 두 분께서 일본에서 귀화했으니 두 분은 물론, 후손이 서로 의지했겠지요.”

함박김씨가 시조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시조의 묘소를 정비해 비석을 세우고 가계보를 정리한 때는 겨우 1996년 무렵이다.

김성인의 12세손인 김병육씨(52)는 “교지를 지금껏 지켜온 조상들에게 감사한다”며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서 시조의 행적을 연구해 한일간 평화의 가교로 선양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대구 가창 우록의 김충선

◆사야가 김충선

조총 제작술 등 전수
선조가 성·이름 하사
삼란공신으로 추대
양국 교과서에 실리고
서원·우호관 등 설립
평화 상징적 존재로

일본 출신 조선 귀화인 가운데 상징적인 인물은 김충선(사야가·沙也可)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가면 한 일본인이 남긴 드라마틱한 삶의 흔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교과서에도 나오는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22세의 나이에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조·일전쟁이 명분이 없는 전쟁임을 깨닫고 조선의 문화와 예의를 흠모해 수백명의 부하와 함께 귀화했다. 이를 ‘항왜’라 하는데,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순왜’와 대비된다.

조선에 귀화한 사야가는 조선군에 조총제작기술과 철포대(일본 조총부대) 전술을 전수했다. 사야가는 경상우병사 김응서 장군과 함께 경주와 울산 등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충과 선을 행하라’는 의미로 김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賜姓), 광해군 10년 정헌대부(정2품)에 올랐다.

이후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워 삼란공신으로 추대됐다. 노후에 녹동으로 낙향한 그는 가훈과 향약을 지어 지역의 백성을 가르쳤다. 1789년(정조 13) 대구지역 유림에 의해 창건된 녹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885년 재건됐다. 모하당문집, 친필, 교지, 조총 등의 유품과 유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김충선의 후손이 쓴 모하당문집을 위서로 보고 김충선을 ‘매국노’ ‘혼혈’로 부르며 날조된 인물이라고 선전하며 애써 그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영남일보가 1974년 ‘고향’의 시리즈로 김충선을 다루는 등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의 각종 언론에서 김충선을 조명했다. 특히 영남일보는 99년 10여차례 연재를 하며 김충선을 집중 보도했다.

2007년 조선통신사400주년기념 한·일국제심포지엄이 열리는 등 김충선은 한일 간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10년 일본 ‘와카야마현의 관광을 생각하는 100인 위원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사인 기슈도쇼구 경내에 김충선 장군 비석을 세웠다.

김충선의 12세손인 김상보 사성김해김씨 종친회장은 “1만2천600여명 항왜 중 400년간 떳떳하게 조상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는 성씨는 우리밖에 없었다”며 “일본 전역에 김충선 장군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모하당의 역할이 크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한일우호관이 준공돼 김충선 장군이 또다시 전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 회장은 “한일우호관이 한일간 평화의 중심과 가교가 되길 바라며 우록에 한일우호촌을 조성해 일본관광객이 원스톱으로 보고, 먹고, 쇼핑하고 쉬어갈 수 있는 명소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달성한일우호관

모하당 김충선 장군을 모시고 있는 녹동서원 옆에 자리한 한일화합의 공간이다. 지난해 50여억원을 들여 2층 건물로 개관했다. 1층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 3D 영상관에서 김충선이 조·일전쟁에 참전하게 된 경위와 귀화 후 그가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삶을 생생히 감상할 수 있다. 전시관에는 또 삼국시대~조선시대 한일교류사를 비롯해 조선통신사, 근현대 한일외교사도 시대별로 함께 전시했다. 전시품으로는 우록리 도로확장 공사 중 발굴된 조총과 당채목각촛대, 모하당 문집과 목판, 교지 등이 있다.

1층에는 한복과 기모노 유카타 등 한·일 전통의상, 다도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2층 기획실에서는 지역에서 보기 힘든 옛 일본의 역사유물, 갑옷, 투구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이 밖에 우록리에는 녹동서원, 녹동사, 충절관, 김충선 장군 묘소 등이 있다. 매년 1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우록리를 찾고 있으며, 대부분이 일본관광객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