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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 관장은 많은 대련을 하고 시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손가락이나 발가락에 테이핑을 해야 한다. |
가로·세로 8m 남짓의 사각 링. 공이 울리면 단 5분의 기회가 주어진다. 5분씩 3라운드. 이 짧은 시간 동안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치명적 공격 외에 거의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이곳은 치고 받고, 꺾고 조르는 치열한 정글!
맞붙은 선수들은 바로 눈앞까지 주먹이 들어와도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이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내 눈앞에 주먹이 들어와도 절대 눈을 감지 않는 것이다.
◆ 서른아홉의 노총각 체육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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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대구 이종격투기 아카데미’ 관장이 총각 때 세운 큰 목표 두 가지. A 평생직장, B 배우자. A만 성공하면 B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한 건 큰 착각이었다. |
약속한 시간에 맞춰 이재훈 체육관장이 헐레벌떡 체육관으로 들어선다. 방송 촬영이 있는 날은 하필 올겨울 들어 최대 한파라며 모두가 꽁꽁 싸매고 잔뜩 움츠린 날. 그런데 180㎝를 훌쩍 넘는 그의 키와 단단한 몸에선 어쩐 일인지 훈김이 풀풀 났다.
“체육관 옥상에 살고 있는데, 수돗물이 얼어서” 세수라도 하기 위해 근처 목욕탕에 다녀왔단다. 방송섭외차 전화통화를 할 때만 해도 혹시 체육관에서 숙식하면서 운동하는 젊은이가 있냐는 질문에 “하이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젠 그렇게 힘들게 운동하는 애들 없습니다” 하더니. 하긴, 올해 나이 서른아홉이면 더 이상 ‘애’라고 하긴 힘들고, 옥상의 어엿한 살림집에 살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겠다. 아침 댓바람부터 꽝꽝 언 수돗물과 씨름을 하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체육관을 밥 먹듯이 드나들며 프로 선수를 희망하는 주짓수 꿈나무에겐 매일 체육관으로 출근하는 이 관장의 삶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목표다.
올해로 주짓수에 입문한 지 11년. 이재훈 체육관장이 운영하는 ‘대구 이종격투기 아카데미’(대구시 달서구 죽전동)는 지난 9년 동안 주짓수 전국 랭킹 1위 자리를 고수해온 부동의 체육관이다. 비록 총각들에게 중요한 ‘평생 직장’과 ‘배우자’ 중에서 평생 직장을 우선시하면 좋은 배우자는 저절로 온다는 그의 신념이 바야흐로 세월의 흐름 속에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공이 울리면 ‘5분의 싸움’
치고 받고, 꺾고 조르며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
눈앞에 주먹이 들어와도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돼
싸움이 뭐가 그리 좋아?
형언 못할 ‘수컷의 본능’
◆ 내 삶을 뒤바꾼 비디오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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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들이 가장 많이 오는 오후 7시 수업. 초등생, 직장인, 주한미군, 여학생 등 다양하다. |
“종합격투기가 수능이라면, 주짓수는 영·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수학을 못하면 수능시험이 힘들잖아요” 용어를 헷갈려 하자, 언변 좋은 이재훈 관장이 더없이 좋은 비유로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종합격투기(綜合格鬪技, Mixed Martial Arts, MMA)는 타격과 그래플링(Grappling ‘엉겨 싸우기’라는 뜻으로 넘어져 뒤엉켜 싸우는 그라운드 기술)을 넘나들며 다양한 격투기술을 사용하는 격투 스포츠다. 권투나 레슬링 같은 많은 격투 스포츠가 타격이나 관절기, 던지기 중 한 계열의 기술만을 채용하거나 어느 하나를 금지하는 것에 반해, 종합격투기는 급소 가격 등 생명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치명적인 공격 외에 거의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현대적인 MMA가 정립되기 이전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무술 간 대결’이란 뜻으로 이종 격투기(異種格鬪技)라 부르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씨름 선수를 했는데, 모래판에 상대를 메다꽂으면 그걸로 경기는 끝이에요. 그런데 어디 실제 싸움이 그렇던가요? 내가 상대를 넘어뜨린다 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한 번 넘어졌다 해도 기력이 남아있는 한 다시 일어서서 맞붙는 것이 실전이다. 실제로 태권도 좀 배웠답시고 제아무리 정확한 돌려차기 기술을 구사해봐야 실제 싸움에선 악으로 깡으로 덤벼 코피 먼저 터뜨리는 놈이 이기지 않던가.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 하나.
‘태권도 고수랑 쿵후 고수랑 싸우면 대체 누가 이길까.’ 학창시절 무협영화 깨나 봤던 사람들이라면 ‘이소룡이 세다, 성룡이 세다’ 친구들과 입씨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궁금증과 호기심은 세계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마침내 1993년 미국 덴버에서는 내로라하는 레슬링선수, 복싱선수, 가라테선수 등 여러 종류의 무술 고수들이 하나의 링 위에 맞붙어 최고 강자를 가리게 된다. 바로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경기의 시작이었다.
“95년도인가, 그때는 비디오테이프 시절이었어요. 백수이던 친구 하나가 어느날 저한테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주면서 ‘이게 진짜다’ 하더라고요. 친구랑 나란히 앉아서 보는데,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추구하던 운동이 바로 그런 거였거든요.” 비디오테이프 속에 담긴 UFC 경기 장면은 스무살 피끓던 청춘을 달뜨게 했다. 그리고 당시 UFC 경기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중원무림의 절대고수는 ‘주짓수’ 기술을 연마한 브라질의 그레이스 가문이었다. 한마디로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 500만원 들고 무작정 떠났던 캘리포니아
주짓수(Jiu-Jitsu)는 일본의 유도가 브라질로 건너가 발전한 것으로 관절 꺾기나 조르기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술이다. 우리나라의 주짓수 역사는 약 10년. 비디오테이프를 마르고 닳도록 바라보며 분석하고 ‘무규칙 격투 연구모임’이란 동호회 활동을 통해 전국 각지의 실력자와 교류했지만 당시만 해도 제대로 주짓수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싶었죠. UFC가 열리는 미국으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융통한 돈은 겨우 500만원이었다. 그 돈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무려 6개월을 버텼으니 말 그대로 죽기 살기로 덤빈 셈이다. 돈이 될 만한 일은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숙박비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잠은 주로 화장실에서 새우잠을 잤다. 하루 세끼 햄버거만 먹었지만 그때 배운 기술로 한국에 돌아와 대구에 주짓수 한국 본관을 차렸다.
“그때 같이 운동했던 제 후배들이 서울, 전라도… 전국 각지에 하나 둘 지부를 차려 나갔죠. 지금은 지부가 18개나 되니까, 요즘 애들은 운동하기 좋은 거죠.” 현재 대구이종격투기 체육관 총무를 맡고 있는 박대승씨 역시 주짓수 체육관을 차리기 위해 이곳에서 실습 중이다.
좋아하는 일을 業(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체육관에는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하루 평균 90여명의 수강생이 몰려드는데, 90%가량은 취미로 배우는 것이지만 그중엔 운동을 業으로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친구들도 있다.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얼마 전 전업선수로 컴백한 윤길상씨는 선수생활의 가장 큰 장애가 ‘생계’라고 말한다. 문제는 역시 돈이다. 비록 체육관장이라 하더라도 좋아하는 일이 業이 되면 좋아하는 일 역시 ‘돈벌이’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프로 선수들은 대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일까.
◆ 링 위에 서지 않으면 패배도 없지만, 승리도 없다
오는 2월 ROAD FC 경기로 프로 데뷔를 앞둔 이정영 선수(19)는 케이블 TV ‘주먹이 운다’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유망주다. 대회 일정이 잡히면 하루 5시간 이상씩 고된 집중 체력훈련이 시작되고, 대회 즈음해서는 10㎏ 이상 체중감량을 해야 하는 등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프로선수들은 경기 뛰면 파이트 머니를 받는데, 최소 100만원에서 최대 수천만원대라고 합니다. 또 스폰서 계약금을 받을 수도 있고, 외국 선수들은 경기 영상 수입도 있죠.” 하지만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렇듯, 프로선수의 삶에는 늘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 종합격투기 아닌가. 그 치열한 경기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의 입장은 어떨까. “처음엔 반대를 하셨죠. 하지만 제가 좋아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시니까 이제는 응원해 주시는 편이에요.”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대체 치고 받는 그 일이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막강한 상대와 링 위에서 만나게 될 땐 패배가 두렵지 않으냐고. 그들은 순진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두려울 때도 있지만, 적어도 도망치긴 싫으니까요. 모든 승리는 결국 링에 오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그것을 ‘수컷의 본능’이라고 했다.
상대와 맞붙어 승부를 겨뤄야 하는 사각의 링. 그것은 때로 프로선수만의 몫은 아니다. 살면서 몇 번의 승부를 해야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때론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순간도 몇 번이고 온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늘 승률을 먼저 계산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지레 싸움을 포기하고 만다. 그렇게 나 자신과 타협하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해간다. 땀 흘릴 일도 없고 피 흘릴 일도 없다. 패배하지 않으니 마음 부대낄 일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싸우지 않으면 지지는 않겠지만 이길 수도 없다는 것. 그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파이터’다. 그러니 결국은 이길 것이다.
(오늘 오후 6시20분 TBC TV ‘리얼인터뷰 通’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글= 이은임 방송작가 sophia9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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