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아련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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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20  |  수정 2014-11-20 08:25  |  발행일 2014-11-20 제19면
[문화산책] 아련한 추억
황준성 <한국재활음악치료학회장>

철모르던 시절이 지나고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비록 콧물을 흘리며 어머니 손을 잡고 1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지만 난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제법 의젓하게 서있었다. 앞에 선생님들이 일렬로 쭉 서고 잠시 후 단상에 교장선생님이 올라가 연설을 했다.

우리 집은 산골에 있어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꽤 멀었다. 당시 시내에는 버스도 있고 경운기를 갖고 있는 집도 있었지만 우리집엔 없었다. 우리집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아버지의 자전거였다. 그러나 그 자전거는 아버지 외에는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늘 걸어다녀야 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어머니와 자주 다투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비척비척 돌아오면 우리는 어디론가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나마 아버지가 일찍 잠드시는 날엔 근처에 숨어있다 조용히 집으로 돌아오면 되었지만 늦게까지 안 주무시고 소리를 지르시는 날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피난을 가야 했다.

당시엔 마땅한 피난처가 없으니 4형제와 어머니가 나란히 손을 잡고 신작로를 걸어서 의성읍내의 교회까지 걸어가곤 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했지만 달빛의 인도로 길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려보며 엄마와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교회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버지가 주무시는 새벽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러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부지런히 우리 형제를 뒷바라지했다. 정말 신기한 것은 당시 어머니가 의성읍내에 있는 성냥공장을 다니셨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우리 형제는 항상 어머니의 가방을 열어봤는데 거기엔 빵이나 과자가 들어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우리를 생각하며 공장에서 참으로 받은 간식을 안 드시고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던 것인데 우리는 철도 없이 어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가방에 있는 빵을 당연하다는 듯 꺼내 먹곤 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어머님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삼 떠올려 본다. 그런 어머니의 헌신이 지금 어머니의 아들, 딸인 우리에게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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