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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향촌동 모나미 다방에서 열린 이효상의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 모습. <향촌문화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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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소설가 최인욱은 그의 첫 단편집 ‘저류(底流)’ 출판기념회를 향촌동 살으리다방에서 열었다. <향촌문화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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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영남일보 연재소설 ‘스딸린의 老衰(노쇠)’. 1951년 6월7일부터 18일까지 총 8회에 걸쳐 실린 이 작품은 말년에 이른 스탈린의 내면을 다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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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시인 조지훈은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라는 제목으로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을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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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1일부터 영남일보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여성전선(女性戰線)’은 파격적인 애정관을 작가 특유의 필치로 그려내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대표작인 ‘자유부인’을 쓰게 된 실질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
전쟁은 피폐하고 절망적이었다. 전란의 심연 가까이에서 문학은 흔들리며 휘청거렸다. 하지만 문인들은 펜을 꺾지 않았다. 절망적이었지만 그들은 버텼고, ‘종군 작가’의 포목 완장을 달고 총 대신 펜을 들었다. 더러는 전선으로 나아갔다. 구국의 기치 아래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그들의 기록은 ‘전선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졌다. 전란의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문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공간, 그 시절 한국문단의 중심이 바로 대구였다.
전란의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文人들은 펜을 꺾지 않았다
당시 서문로 영남일보 맞은편
감나무집은 합숙소가 되었고
터줏대감은 시인 구상이었다
청록파 등 한국 문단 대표들
1·4후퇴 전후 신문사에 북적
장덕조는 문화부장으로 입사
자녀 “오늘자 영남일보” 가판
박두진은 베개 속 좁쌀 먹기도
#1. 총 대신 펜을 들고…문총구국대의 태동
1950년 6월28일 새벽, 한강철교는 시뻘건 폭음에 휩싸였다. 굉음과 함께 붉은 불기둥이 치솟았고, 시커먼 강물은 몰려든 피란민들을 삼켰다. 수면 위에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어둡고 사나운 냄새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문단은 비상체제로 편성됐다. 한강철교가 폭파되기 전 서울을 빠져나온 문인들은 임시수도인 대전에 집결,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결성한다. 조지훈의 주도로 김광섭, 이헌구, 서정주, 서정태, 김송, 박목월, 조영암, 박연희, 이한직, 박노석, 박화목, 조흔파, 구상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국군 정훈국 소속으로 전쟁의 참화를 몸소 받아들이며 펜을 들었다. 대전에서 발족한 문총구국대는 곧바로 시인 이한직을 대구로 파견해 후방 문인들에게 뜻을 함께할 것을 촉구한다.
대구에서는 이효상을 지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윤수, 김사엽, 김진태, 최계복, 강영기, 김영달, 조상원, 백락종, 유기영, 김동사, 최해룡, 박양균, 신동집, 이호우 등으로 구성된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를 발족했다. 경북지대가 결성된 곳이 바로 서문로의 막걸리집 ‘감나무집’이었다. 당시 영남일보는 감나무집 맞은편에 있었다.
전세는 날이 갈수록 불리했다. 결국 대전에 있던 문총구국대는 피란길에 나서야 했다. 대구로 내려온 문총구국대는 경북지대 문인들과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종군활동에 들어갔다. 대민방송의 원고를 쓰고, 위문공연과 시국강연을 열었다.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글과 포스터, 전단과 표어를 작성했다. 일부는 국군을 따라 종군했다.
문총구국대 소속 피란 문인들의 거처 역시 ‘감나무집’이었다. 시인 구상은 감나무집의 터줏대감이었다. 당시 구상은 국방부 기관지였던 ‘승리일보’ 주간이었고, 문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며 그들을 도왔다. ‘감나무집’은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피란 문인들에게 합숙소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다시 문학의 꽃을 피웠고, 낭만을 키우며 삶을 노래했다. 그사이 구상과 함께 종군해 김천 전투를 목격한 서정주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대구를 떠났고, 다부동 전투에 종군했던 조지훈은 시 ‘다부동에서’를 썼다. 그 시절 그들의 명징한 기록은 ‘전선문학’으로 불리며, 시대의 광기를 치유했다.
감나무집 맞은편에 있었던 영남일보는 전선문학의 산실이었다. 문총구국대 소속 문인들은 영남일보 지면을 통해 전쟁의 참화와 애국심을 진작시키는 글을 쏟아냈다. 시와 수필이 주를 이루었다. 신동집은 1950년 9월3일자 영남일보에 시 ‘祖國으로 가는 길’을 발표하며 ‘조국으로 가는 길은 항쟁의 길이고/ 자유로 가는 길은 진격의 길이다/ 넘어져도 열번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자’고 외쳤다.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장이었던 한솔 이효상은 1950년 9월6일자 영남일보에 실은 시 ‘戰爭’에서 전쟁터로 아들을 보낸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마침내 사랑하는 자식 놈을 입대시키던 날/ 나도 마저 입대하기를 비로소 진정 원하여 보았다/ 평생에 깨끗이 살기를 뜻한 이 몸이 가다가 바위에 부닥치면/ 수정같이 깨어지기를 뜻한 이몸이/ 애기처럼 조국을 부둥켜 안고 하루 밤 깊은 시름을 하여 보았다/ 전쟁은 마침내 내 주먹 안에 왔다’
문인들은 9·28 서울수복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감나무집’에 머물렀다. 낙동강 전투에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종군했고, 피란 문인들은 썰물처럼 대구를 빠져나갔다.
#2. 1·4후퇴 전후…문인들의 안식처 영남일보
1951년 1월, 전세는 다시 한번 뒤바뀌었다. 피란민들로 엉겨 붙은 열차를 타고, 문인들은 난마처럼 뒤얽혀 웅성거리는 대구에 도착했다. 1·4후퇴였다. 대구에는 전쟁 초기 때보다 더 많은 피란 문인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영남일보를 자주 드나들었다. 서울의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지냈던 당시 사장 김영보와 안면이 있었던 터였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정비석, 김팔봉, 김소운, 최정희, 최인욱, 최태응, 류주현 등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영남일보에 북적거렸다.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으로 계속 일하고 있었던 시인 구상 역시 1·4후퇴를 전후해 영남일보에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영남일보의 배려로 아예 신문사에 집무실을 꾸렸다. 김영보 사장 바로 옆자리에 책상을 두고 승리일보를 제작해 나갔다.
그 시절 문인들은 해가 지면 향촌동 술집으로 향했다. 무시로 외상술을 마시면서도 낭만이 있었고 호기로웠다. 술값이 밀리고 쌓이면 정훈국 소속 군인들이나 실업가, 지방 유지들이 대신 갚아주었다. 문인들의 외상 술값을 특히 많이 갚아준 사람은 바로 구상이었다. 피란 문인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도 했고 문단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그는 젊은 문학도들에게도 인정 있고 넉넉한 사람이었다. 명망과 신용을 갖춘 신사였고, 향촌동의 귀공자였으며, 향촌동의 백작으로 불렸다. 구상은 1952년쯤 승리일보가 폐간된 이후에는 전 사원의 요청으로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다.
구상과 더불어 피란 문인이었던 아동문학가 마해송도 영남일보에 머물렀다. 영남일보는 신문사 뒷문 입구 전화교환실을 옮기고 그곳에 마해송의 전용 책상을 마련해 주었다. 연고도 없는 대구에서 그는 향수병을 자주 앓아야 했다. 1951년 1월4일자 영남일보에 실은 ‘대구 辛卯(신묘)’라는 수필에서 당시 마해송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실건 좋건 간에 객지에서 1951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략) 객지의 설이란 그다지 새로운 감이 있을리 없건만, 이번의 낯선 설만은 새삼스럽게 서글펐다. (중략) 가족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중략) 나 한사람이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무리를 무찔러 없애 버려서 겨레와 자손이 해를 받을 염려 없도록 해놓아야 그것이 진실로 사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서울 갈 생각만 하고 있다.’
월간 종합잡지 개벽사 기자 출신인 소설가 장덕조는 구상보다 먼저 영남일보와 인연을 맺었다. 장덕조는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말, 대구로 내려와 고단한 피란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격적으로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입사하게 되고, 짧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영남일보 50년사’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해산된 종군작가단 활동 재개
소설·평론·시사 만화·동요 등
다양한 장르로 영남일보 실어
시인 조지훈은 1952년 신년호에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 게재해
정비석의 ‘여성전선’도 큰 인기
전쟁이후 영화로 제작될 정도
‘…(다방에서 만난) 피란 문인 한 사람이 생각난 듯 말했다. “영남일보 보셨어요?” “신문 볼 틈이 어딨어? 아이가 아팠는데.” “장 선생님을 찾는 기사가 몇 번이나 났습디다. 영남일보에 가 보시오.” 나는 영남일보사로 갔다. 문화부장 자리를 비워 놓고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일자리를 얻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다. 이제는 최소한 굶지는 않게 되었다.’
피란 문인들이 하나둘 영남일보에 둥지를 틀면서 갈 곳 없는 문인들은 날마다 영남일보를 드나들었다. 낮에는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며 피란살이를 달랬다. 밤에는 편집국 의자를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잠들었다. 가족을 거느리고 내려온 문인들의 삶은 더욱 서글펐다. 마땅한 벌이가 없었고, 생계는 막막했다. 일부는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입사한 장덕조의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어떤 이는 신문사 경영진을 직접 찾아가 장덕조의 월급을 선불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영남일보 직원들은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듬었다. 의자 위에서 새우잠을 자는 문인들을 위해 밤새 난로를 피워 주고 밥을 챙겨주었다. 판매부에서는 문인의 자녀들에게 그날 신문을 나누어 주고 가판을 하게 했다. 적은 돈벌이였지만 그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신문을 받아든 문인의 아이들은 “오늘 자 영남일보요”를 소리치며 거리를 달렸다. 삐적 마른 다리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글쟁이 아비는 마음이 아렸고, 어미의 가슴은 시렸다. 그래도 펜을 꺾을 수는 없었다.
#3. 종군작가단의 산실 대구
9·28서울 수복 후 해산한 문총구국대가 육·해·공군 각 군별로 종군작가(문인)단을 결성, 활동을 재개한 시기도 1·4후퇴 이후였다. 가장 먼저 공군종군문인단(空軍從軍文人團), 일명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가 1951년 3월 대구에서 조직됐다.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 조지훈, 사무국장은 최인욱이 맡았다. 최정희·곽하신·박두진·박목월·김윤성·유주현·이한직 등이 주축이 됐다. 발족 1년 후인 1952년에는 황순원·김동리·전숙희·박훈산 등을 새로 영입했다. 창공구락부는 조종사들과 일상생활을 같이하며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작품 낭독회와 예술제 등 문예대회도 개최했다. 소설가 최인욱이 각색하고 최은희, 황정순 등이 출연한 ‘날개 춘향전’은 장병과 민간인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공연이 열린 대구 국립극장은 연극을 보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였다. 전쟁 속에서 문학과 예술은 유일한 위안이었고, 사기를 북돋워주는 무기였다.
창공구락부의 연락소는 덕산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인들은 한겨울에도 난로 없이 종군기를 쓰고 잡지를 편집했다. 쌀 배급이 여의치 않을 때는 굶는 일도 많았다. 박두진은 먹을 것이 없어 베개 속의 좁쌀을 꺼내 죽을 쑤어 먹었다고 전해진다.
창공구락부가 조직되고 두 달 후인 5월26일에는 정비석, 박인환, 양명문, 그리고 출판관계 인사들과 만화가까지 합세한 가운데 ‘육군종군작가단’이 결성됐다. 육군종군작가단이 발족한 곳은 아카데미극장 골목에 있던 ‘아담(雅淡) 다방’이었다. 발족 당시 단장에 최상덕, 부단장에 김송, 상임 위원에 최태응, 박영준, 이덕진 등이 임명됐다. 사무실은 영남일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단원으로는 장덕조·최태응·조영암·정비석·김진수·정운삼·성기원·박인환·방기환 등이 주축이었다. 시인 구상은 12월1일 새롭게 합류해 부단장을 맡았다.
#4. 전선문학의 전성기를 이끈 영남일보
종군작가(문인)단이 대구에서 조직되면서, 문인들의 작품이 연일 영남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됐다. 전쟁 초기와 달리 시·수필은 물론이고 소설, 평론, 시사만화, 동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실렸다. 육군종군작가단 소속의 만화가 김용환은 시사만화를 연재했고, 김장수는 동요를 지면에 발표했다. ‘전선문학’의 전성기나 다름없었다. 작품 대부분은 반공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더러는 피란살이의 고단함과 향수를 달래는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문화계의 전망을 내놓은 특집 형식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시인 조지훈은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을 실었다.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지훈은 ‘역사의 향방이 오늘처럼 이렇게 엉클어진 적도 그다지 많았던상 싶지 않다. 이럴 것 같기도 하고, 저럴 것 같기도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전망이 서질 않는다는 것은 곧 장래를 내다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쓰러지지 말고 조금만 더 참자. 이것이 1952년 전쟁에 휩싸인 한국문화계의 동의(動議)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시절 영남일보는 본격적으로 소설도 연재한다. 김동리의 ‘스딸린의 老衰(노쇠)’가 그 첫 번째 작품이었다. 1951년 6월7일부터 18일까지 연재된 ‘스딸린의 老衰(노쇠)’는 소련이 6·25전쟁의 배후로 개입하게 된 내막과 말년에 이른 스탈린의 내면을 다룬 작품이었다.
김동리는 서두에서 ‘지금 스딸린은 커피 한 잔을 거진 다 마시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제○○호 특수 데레비존으로 그의 대뇌 속을 비치어보기로 한다’고 서술하며 스탈린의 내면에 접근하기 위한 상상적 형상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김동리의 작품은 ‘작가의 사정에 의해 연재를 중단한다’는 사고와 함께 8회로 끝을 맺어야 했다.
영남일보 연재 소설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육군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던 정비석의 ‘여성전선(女性戰線)’이었다. 1952년 1월1일 첫 회가 실린 후 그해 7월9일까지 총 180회가 연재됐다. 대립적인 성격의 두 여성을 통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애정관을 작품 속에 드러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재 도중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고, 전쟁 이후인 1957년 김기영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됐다.
특히 정비석이 자신의 대표작인 ‘자유부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영남일보의 ‘여성전선’이 실질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부인은 전쟁 직후인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성 윤리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당시 서울신문 측은 영남일보에 연재한 정비석의 ‘여성전선’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에 착안, 작가의 서울 귀환 기념 작품으로 자유부인을 청탁했고, 이후 신문 연재 소설 초유의 인기를 모았다.
전쟁이 끝나고 피란 문인들은 하나둘 서울로 떠났다. 전란 속에서 그들이 머물렀던 대구, 피란과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표류했던 그들의 공간은, 이제 희미한 기억 저편에 빛바랜 사진처럼 앉았다. 하지만 그 시절,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문학에 대한 열정을 쏟아내기 위해, 그들이 써내려간 기록은 지금 한국문단에 ‘불멸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자료조사=조사팀 박성희
참고문헌=6·25전쟁 당시 영남일보 신문, 영남일보 50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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