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서 태어난 82세 박영애씨에게 사할린이란…

  • 이은경
  • |
  • 입력 2015-09-11 07:37  |  수정 2015-09-11 07:38  |  발행일 2015-09-11 제6면
“일본말→조선말→러시아말 정작 어느 말도 제대로 못해”
20150911
채소를 키워 시장에 내다팔아 생활하고 있는 박영애씨. 탄광에서 일하던 박씨의 아버지는 탄차에 깔려 돌아가셨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18세때 탄광에 돈 벌러간 아버지
15년 만에 고향집으로 편지 한통
어렵게 만나 함께 산 지 11년 만에
아버지 사고로 여섯 식구 영 이별


박영애씨(81)의 아버지 박춘우씨(1899~1943)는 동갑내기 아내와 결혼한 18세때 사할린 중서부 지방의 탄광촌 크라스노 고르스크로 왔다. 돈 많이 벌어서 2년 뒤 돌아오겠다며 집을 떠난 아버지는 15년 만에 고향 마을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던 어머니 김덕순씨는 아들을 앞세우고 일본을 거쳐 사할린으로 왔다. 코르사코프 항구에 도착한 어머니는 아들을 남편이 있다는 크라스노 고르스크로 보냈다. 탄광회사 기숙사에 도착한 아들은 아버지를 수소문했다.

“경남 거창에서 오신 박씨 어른을 찾습니다.”

그 탄광에 경남 거창 출신의 박씨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내가 거창 사람 박가요. 누구시오?”

“아부지, 절 받으시소. 제가 아들입니다.”

“내게는 아들이 없는데, 누구인고?”

아버지와 아들의 첫 만남은 그랬다.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몰랐던 그는 아들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항구도시 코르사코프로 돌아왔다. 부부는 탄광촌에 있는 작은 집을 구해 함께 살았다. 그리고 딸 셋을 낳았는데, 큰 딸이 박영애씨다.

박영애씨의 아버지 박춘우씨는 1943년 석탄을 가득 실은 탄차에 깔려 세상을 떠났다. 사고였다. 회사에서는 위로금도 연금도 나오지 않았다. 20대 중반이 된 아들은 돈을 벌겠다며 다른 도시로 떠나버렸고,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는 말도 통하지 않고, 기후도 음식도 물도 낯선 땅에서 딸 셋을 홀로 키웠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다른 집에 가서 일을 했어요. 감자를 재배하는 일본 사람 집에 가서 종일 감자 캐는 일을 하고 나면 감자 한 소쿠리를 받을 수 있었어요. 마음씨가 좋은 주인은 소쿠리가 수북할 정도로 감자를 주었고, 고약한 주인은 겨우 몇 알을 주었습니다. 농가에 가서 채소를 사다가 시장에 내다팔기도 했습니다. 먹고살기 힘들었지요. 양식이 없어서 멀건 쑥국을 끓여먹는 날이 많았어요. 새벽에 집을 나선 어머니는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왔는데, 어린 동생들 하고 컴컴한 집에 있기가 무서워서 매일 밖에 나가서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어요. 그때 막내는 두세 살, 바로 아래 동생은 네댓 살쯤이었습니다.”

박씨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소학교를, 전쟁이 끝난 뒤엔 조선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소수민족 학교를, 그 뒤에는 러시아 학교를 다녔다. 막내 동생을 업고 학교에 가서 옆자리에 앉혀놓고 공부를 했다.

“일제 때는 한국말을 쓰면 친구나 선생님이 막 나무랐습니다. 순사한테 고발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일제 때는 일본말을 썼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직후에는 조선학교에서 조선말을 배웠어요. 그런데 또 1960년대 중반부터는 러시아말을 배워야 했어요. 세 나라 말을 배웠지만, 정작 어떤 나라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박씨는 젊은 시절 지붕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쳐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다. 1934년생, 한국 나이로 82세인 박씨는 구부정한 허리로 지금도 채소를 키워 시장에 내다팔며 살아간다.

글·사진=러시아 브이코프에서 이은경기자lek@yeongnam.com

기자 이미지

이은경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