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12·<끝>]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을 것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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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04   |  발행일 2015-12-04 제5면   |  수정 2022-05-19 09:58
“부모형제가 터 잡고 손주가 사는 곳…이제 와 어디로 간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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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 초입의 쓰러져가는 집에는 우토로 마을을 살리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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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은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집단합숙을 위해 건설된 곳이다. 삼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함바집이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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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과 인접한 일본인 마을의 경계.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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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남 할머니

경남 사천 출신 강경남 할머니
83년前 아버지 찾아 오사카로…
1945년 온가족 우토로에 정착

日 패전하면서 무국적자 신세
탄피 등 주워다 팔며 겨우 연명
89년 강제퇴거 중장비 진입 땐
“나를 깔고가라” 맨땅 누워 저지


강경남 할머니(91) 가족이 일본 우토로로 온 것은 자신들의 뜻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를 찾아 오빠와 언니가 일본으로 왔고, 아버지를 만났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강 할머니가 건너왔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할머니가 8세가 되던 1932년이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오사카였다. 오사카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일본에 대한 미군 공습이 거세지던 1945년, 할머니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우토로에 들어와 평생을 살았다.

우토로 마을에는 당시 일본이 건설한 비행장과 비행기 조립공장이 있었다. 현재 긴테쓰교토선 이세다역과 오쿠보역 사이 구간으로 지금은 일본 육상자위대 오쿠보 주둔지가 있다. 조선인들은 비행장 건설 노무자로 혹은 비행기 조립공장 노무자로 일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공장 밖 벌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강 할머니의 오빠도 이곳 공장에서 일을 했다. 여자들은 공장 노무자를 위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자 이곳 비행장과 조립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공장이 가동을 멈추자 1천300여명의 우토로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남자들은 종일 볏짚을 엮어서 만든 지붕 아래 누워 한숨을 쉬었고, 여자들은 갓난아기들에게 마른 젖을 물린 채 눈물을 지었다.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갈 곳이 없으니 떠날 수도 없었다.

“산에 가서 터진 포탄 쪼가리를 캐다 팔았고, 인근 일본인 마을의 후미진 곳을 헤매며 녹슨 금속을 주워 팔았어. 함석판, 고철, 병 등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주워 팔았다. 막노동 자리가 생기면 모두들 달려 갔다. 불법인 줄 알지만 탁배기(탁주) 밀주를 만들어 일본인들에게 팔기도 했어. 집집마다 한두 마리씩 돼지를 키웠고, 일본인들이 경작하는 녹차밭에서 수확철이면 품팔이를 하기도 했고.”

입에 풀칠조차하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우토로의 조선인들은 내일을 건설해나갔다. 1946년 ‘구제초등학원’을 지금의 우토로 마을회관 자리에 건립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본 정부나 민간의 도움을 받아서 세운 학교가 아니라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던 조선인이 힘을 모아 지은 학교였다. 1949년 일본 정부가 학교 폐쇄령을 내리기 전까지 이 학교는 조선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우리는 떠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은 끌려왔고, 어떤 사람은 미군의 폭탄을 피해 들어왔지만,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가르치며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1953년 일본 정부가 ‘일본헌법’을 공표했다. 일본인의 주권과 권리를 주장하는 법이다. 일본 패전과 함께 무국적자가 되어버린 재일 조선인들은 어떤 재산권도 주장할 수 없었다. 삽으로 구릉지의 흙을 파내 만든 저지대, 비가 내리면 물에 잠기기 일쑤인 곳, 사람이 살지 않던 땅에 움막을 짓기 시작해 마을을 건설했던 우토로의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강제퇴거 명령이 떨어지면서 마을에 중장비와 트럭이 들어왔다. 강 할머니는 마을 입구에 드러누워 항거했다. “집을 헐 작정이면 나를 먼저 깔아 죽여야 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비록 남루하지만 자신들이 건설한 마을을 그렇게 지켰다.

“내 아버지, 어머니, 오빠 모두 이 마을에서 살다가 이 마을에서 돌아가셨소. 남편도 이 마을에서 돌아가셨소. 큰아들과 딸은 결혼해서 이 마을에서 아이들 낳고 살고, 작은아들은 바로 근처인 이세다에 살고 있소. 우리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을 것이오.”

우토로 마을 회관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할머니는 마을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었다. 굽은 허리,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보행기에 두 손을 의지했지만 할머니는 길에 떨어진 낙엽이 눈에 띌 때마다 주워서 봉투에 담았다. 내일이면 이 장소를 떠날 사람이 할 성싶은 일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번듯한 새 집들도 더러 한둘 들어서는 중이었다. 토지 소유주와 합의가 이루어졌고, 비록 좁은 땅이지만 법적으로 소유권을 보장받은 뒤로 새 집을 짓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우토로는 내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을을 나서는데 단발머리에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고생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마을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조선인 4세, 우토로의 내일이었다.

글·사진=일본 교토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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