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모르면 문화·전통 몰라”…57년간 한인 2·3세 한글교육 헌신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김춘경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원·한인회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1/20160118.010050722590001i1.jpg) |
2014년 8월 광복 69주년 한러수교 24주년 기념 대구의 밤 행사를 마친 뒤 김춘경 회장(오른쪽 다섯째)과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통일 대구시청년협의회 제공> |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김춘경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원·한인회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1/20160118.010050722590001i3.jpg) |
김춘경씨가 한인회장으로 일하던 당시 구입한 한인회 건물은 현재 노인정과 세종한글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민족통일 대구시청년협의회 제공> |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김춘경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원·한인회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1/20160118.010050722590001i4.jpg) |
김춘경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지역 어린이창작협력회가 한국어와 한국 춤, 노래 등을 배우는 유즈노사할린스크 한인문화센터 전경. <민족통일 대구시청년협의회 제공> |
사할린의 겨울은 춥고 매섭다. 1월 평균 기온 영하 20℃. 입 속의 침까지 얼어붙는다는 이 섬을 사람들은 ‘검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라 불렀다. 모스크바에서 걸어서 3년, 러시아는 이곳을 아예 공식 유배지로 삼기도 했다. 평생 가볼 일이 없을 듯한 멀고 먼 이 섬에 3만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패전 전 일본 땅이던 이곳으로 끌려온 지 70여년. 망향의 한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만든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온 이들의 삶은 우리 민족의 한맺힌 역사 그 자체다. 하지만 한민족의 저력은 대단했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도 꽃을 피워냈다. 눈물을 삼키며 땅을 일구었고 혀를 깨물어가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렇게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새싹처럼 한인 2, 3세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꽃으로 피었다.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김춘경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원·한인회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1/20160118.010050722590001i2.jpg) |
사할린의 주거 건물은 대부분 5층 이하의 아파트다. 가장 인기 없는 곳은 1층과 5층. 사할린 사람들은 이 층들을 ‘카레이스키 에타쥐(한국인 층)’라고 부른다. 옛 소련 시절 소수 민족으로 한인들이 당한 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런 한인을 이제는 러시아인들이 부러워하고 있다.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붐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이곳 한인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외적인 변화에 걸맞게 한인사회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박수호 경제학박사(현재 모스크바 거주), 세계평화상 수상자 전학문 생물학박사(현재 하바롭스크 거주),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 강영복 총장 등 많은 한인 지식인이 배출됐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경제 개방의 흐름에 따라 성공한 한인 회사가 사할린 사회경제 발전을 이끌고 있다. 한인디아스포라는 사할린의 100여 민족 중 인구 수 3위로 가장 큰 디아스포라다. 올해 일흔일곱 김춘경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한인회장 역시 자랑스러운 한인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이다.
돈 벌러 간 아버지 무소식에 가족 사할린行
갓 스물 교편잡은 후 한인회장·교수로 활약
黨기관지 간부 민족전통 시의원委 회장 역임
1996년엔 대구민족통일청년회와 교류 물꼬
매년 8·15행사 주관하고 한인회 건물 마련
2008년부턴 어린이창작협력회 ‘소망’ 회장
춤·노래 등 가르치고 할머니 강좌도 열어
“이제 남은 바람이라면…한인 복지관 마련”
◆근면함과 교육열로 미래를 개척하다
여섯 살에 고아가 된 김씨의 아버지(김계병)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데릴사위가 된 아버지는 큰돈을 벌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한국을 떠났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던 지지리도 가난했던 가장은 “2년만 기다려라”며 호기롭게 말하고 짐을 쌌다. 2년은 금방이었다. 온다던 남편은 소식도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어머니도 짐을 쌌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넷을 데리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렇게 김씨의 가족이 일본을 거쳐 사할린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 1944년의 일이었다.
김씨 가족의 삶은 고단했다. 여느 한인들처럼 아버지는 탄광에서 모진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어머니는 산나물을 뜯거나 농사를 지어 장에 내다팔아 끼니를 이었다. 힘든 세월이었지만 9명의 자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한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교육열 덕분이었다.
김씨는 코르사코프시 제8조선중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58년 사할린사범대학교를 졸업하고 13년간 교편을 잡았다. 78년부터 90년까지는 사할린주공산당위원회 기관지였던 ‘레닌의 길로’(새고려신문의 전신) 간부를 지냈다. 90년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문화, 민족전통 및 종교 문제담당 시의원위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95년까지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회 회장으로 일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는 러시아 첫 사립대인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에서 한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한인회장으로 일하면서 김씨는 매년 8·15 행사를 개최했으며 한인회 건물도 구입했다. 덕분에 한인들의 위상과 자부심도 크게 높아졌다. 한인회 건물은 이후에 노인정과 세종한글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사할린주 한인회 부장으로 있던 1996년에는 민족통일 대구시청년협의회 대표단을 초청해 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자매결연 성과도 거뒀다.
◆러시아에서도 우리말·글을 놓지 않다
김씨는 “귀국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할린 동포들은 조금씩 러시아말을 쓰기 시작했고,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조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고, 아이들 장래를 위해서라도 러시아말을 쓰고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말처럼 뒤늦게 러시아말을 쓰기 시작한 탓에 사할린 동포 2세 중에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거나 교수가 되거나 고위직 공무원에 진출한 사람이 거의 없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사할린 북부 지방 사람들이 귀국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러시아말을 배우고 러시아의 문화에 편입하면서 전문직이나 고위직 공무원에 다수 진출한 것과 대조적이다.
사할린에서 다시 한국어 열풍이 분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김씨가 한인이 운영하고 있는 사립대학인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김씨는 “20년 이상 사할린은 한글의 불모지였다. 이 때문에 현재 젊은이들은 모국어를 모르며 모국의 문화, 풍습, 전통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김춘경 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의원·한인회장](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1/20160118.01005072259000106.jpg) |
김춘경씨가 1978년부터 90년까지 간부로 지내며 펴낸 사할린주 공산당위원회 기관지 ‘레닌의 길로’. |
◆한인 1세 위해 여생을 봉사하겠다
“어렸을 때 제 꿈은 음악을 배우는 것이에요. 지난날 꿈은 가정 형편 때문에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이 고령이 되고보니 어떻게 하면 이곳에 남아 있는 한인 1세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봉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김씨는 2008년부터는 유즈노사할린스크지역 어린이창작협력회 ‘소망’ 회장으로 우리 민족 문화와 전통을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한국어교육원, 한인문화센터 등 여러 단체와 결연을 맺고 한국어와 한국춤, 노래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할머니들을 위한 강좌도 함께 열고 있다. 할머니 노래반 ‘무궁화’는 어린이창작협력회 ‘소망’과 함께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열리는 굵직한 행사에 빠지지 않고 올라 무대를 빛내고 있다. 평생을 사할린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김씨의 마지막 바람은 사할린 한인들을 위한 복지관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언어도 문화도 전통도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대한민국이 우리 모국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우리 고국에 대한 무한한 긍지감을 가슴에 깊이 품고 살고 있다”는 김씨는 “아름답고 발전된 우리 조국, 그 덕택으로 우리도 존경을 받는 민족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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