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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식 사할린 코르사코프 시의회 부의장. 이 부의장은 가장 젊은 나이로 코르사코프 명예시민상을 받았다. <<사>인문사회연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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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식 부의장의 태권도 도장. <<사>인문사회연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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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러시아 소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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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뿐 아니라 러시아 본토에서도 매년 전국단위의 태권도 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인문사회연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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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 유배 무국적자 아들로 태어나
세계적 명성 체육대학서 日 무술 배워
88올림픽 개막식 태권도에 반해 전향
5단 실력 쌓아 러 전역 대중화에 앞장
한인사회 스포츠 활성화에 힘 기울여
근면·성실로 시의원에 두차례나 당선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은 성공을 향해 악착같이 살았다. 부모가 국적이 없어서 받는 진학과 취업의 불이익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버림받고 차별받던 무국적자의 굴레에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벗어나고 있다. 1세는 고향에 뼈를 묻고 싶어했고, 2세는 세계 속의 한인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 까만 머리를 하고 김치를 먹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던 어린 시절은 그들에게 더이상 없다.
◆사할린 한인의 성공 신화를 쓰다
사할린주한인협회 임용군 회장과 사할린주한인여성회 권행자 회장은 건설업과 호텔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사할린 한인들의 위상을 높인 대표적 한인 2세다. 권 회장이 운영하는 가가린호텔은 직원만 100여명에 이른다. 허남영 시인은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해 출판했고, 정발레리·오진하씨는 사할린주 두마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할린 최고의 상공인으로 불리는 메가그룹 대표 안창수씨는 한국형 슈퍼마켓 ‘메가폴리스’를 열었다. 한국의 중소기업인 고리코씨앤씨와의 합작 1호 사업인 메가폴리스에 설치된 사할린 최초의 에스컬레이터를 보기 위해 예세니야 거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장사진을 이룬 것은 유명한 일화다. 노점상에서 출발한 안씨는 미용실, 잡화점을 거쳐 건자재 도매상 메가그랜드와 사할린 최고급 4성급 호텔을 오픈하면서 성공신화를 이뤄냈다.
사할린 코르사코프 시의회 부의장, 사할린주태권도협회 부회장, 코르사코프 한인디아스포라사회단체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춘식씨(60·러시아 이름 블라지미르 니콜라예위츠)도 사할린 한인들의 대표적인 롤모델 중 한 사람이다.
◆꿈꿀 수도 이룰 수도 없던 시절
이씨의 아버지 이진술씨는 1940년 사할린으로 들어왔다. “2년만 고생하면 돌아갈끼다.” 2년이 70년이 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일제에 의해 유배된 러시아 사할린의 한인들에게 광복은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패망한 일본은 무책임했고 광복된 조국은 무능력했다. 귀향의 길은 막혀버렸다. 언제 고향에 갈지 몰라 무국적자로 살았다. 직업도 자녀 교육도 불이익을 받았다. 거주지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일곱명의 자녀를 키우느라 이씨의 아버지는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
이씨는 1956년 코르사코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무국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적잖은 방황을 했다. 꿈을 꿀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막막한 인생이었다.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청춘을 보냈다.
1973년 코르사코프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제지 공장에서 산업기계 기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스스로 내 앞길의 삶을 개척해야 했다. 체조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노보시비르스크 체육전문학교에 들어가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덕분에 학교 추천으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레닌그라드체육대학(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체육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때 4년 정도 가라테를 배웠다. 졸업 후에는 코르사코프아동체육스포츠학교에서 체조트레이너로 일했다. 체조를 하던 그가 태권도와 인연이 닿은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였다.
◆러시아에 한국을 알리다
“1988년 올림픽 개막식 때 러시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태권도를 보았어요. 그 전에는 일본의 대표 무술인 가라테를 많이 배웠는데 1990년쯤부터 대부분 태권도로 돌아섰어요.”
대학 시절, 잠시 가라테를 배운 경험이 있던 이씨도 가라테보다 빠르고 정확한 동작이 매력인 태권도를 처음 보고 반해 버렸다. 고국의 태권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씨는 1991년부터 전문 태권도 스포츠 클럽 ‘에진스트보’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200여명의 어린이가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 한인은 20% 정도다.
태권도 5단인 이씨는 국제 카테고리의 태권도 경기 심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럽 대회 심판, 전국 러시아 태권도 대회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1992년 바르셀로나 태권도 올림픽 대회 러시아 CIS지역 대표팀 담당, 1993년 미국 뉴욕 국제경기대회 러시아 국가대표 코치, 1995년 필리핀 국제경기대회·1997년 홍콩 국제경기대회·1999년 서울 국제경기대회 참가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청소년 대중체육스포츠사업 부문의 공로를 인정받아 러시아연방 스포츠·관광 및 청년정책성의 디플롬을 받았다. 또 가장 젊은 나이로 코르사코프 명예시민상도 받았다.
사할린에서 태권도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할린뿐 아니라 러시아 본토에서도 태권도는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매년 전국단위의 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런 대회를 통해 기량 있는 선수들은 국가 대표로도 활동할 수 있어 젊은이 사이에서 관심이 높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씨의 딸 나탈리야와 아들 세르게이도 모두 태권도 자격증을 갖고 있다. 세르게이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체육아카데미를 졸업했고 나탈리야는 사할린국립종합대학 체육과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아버지를 돕고 있다. “코르사코프 체육계에는 태권도 관련 학위를 받은 전문가가 없다”는 이씨는 “딸을 지도일꾼으로 양성하고 아들은 트레이너로 활용해 태권도의 대중화에 힘을 보탤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단합된 한인의 저력을 보여주다
태권도를 통해 한인사회의 대중스포츠 분야 활성화에 힘을 기울여 온 그는 2009년 코르사코프 구역의회 의원에 출마했다. ‘단합은 우리의 힘’, 그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다.
실제로 사할린 한인들은 동향끼리, 마음 맞는 이들끼리 가깝게 지내며 외로움을 달랬다. 이를 ‘동상간 놓다’고 한다. 지금말로 의형제인 셈이다. 부모님 대에서 맺어진 인연은 자식세대까지 이어진다. 그 인연을 아직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할린 한인들. 낯선 타향에서 살아야했던 이들은 서로에게 피붙이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이 있었겠는가.
“사할린에서 경상도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끼리 모여 살았어요. 동생, 형님처럼 도와주며 살았던 것이지요.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았겠어요. 저는 늘 언제 어디서라도 화목하고 단합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여 근면 성실한 한인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었다”는 이씨는 2009년, 2013년 두차례에 걸쳐 시의원으로 당선됐다. 또 20명의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득표로 부의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선친들이 열심히 살았던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당연한 조건’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씨는 “이제는 동포들이 자기의 뿌리와 역사를 찾기 위해 모국에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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