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음식 칼럼니스트 1세대’ 소설가 표성흠·홍성유

  • 이춘호
  • |
  • 입력 2016-04-08   |  발행일 2016-04-08 제38면   |  수정 2016-04-08
전국 맛지도 代父…‘막썰이회’ 등 이름없던 향토음식에 촌철살인 작명
食客열전 제3회
20160408
20160408

2000년 이전에는 방송보다는 신문·시사잡지·여성지 별책부록 등의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그런 곳에 글을 전문적으로 쓸 수 있는 문인, 레저담당 기자 등이 여론을 형성했다. 하지만 맛집 담론은 지극히 제한적으로 형성됐다. 일단 교통망이 제일 문제였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지만 교통은 여전히 거북이 수준. 80년대 후반 마이카붐 전까지 미식가와 식도락가의 행동 반경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국을 누비는 식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관광객이 갈 수 있는 곳도 제한됐다. 전국의 유명 맛집에 대한 정보 역시 바닥권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언론은 맛집에 대한 포문을 열 수 없었다. 음식전문기자도 생길 수 없었다. 다들 자기 동네, 자기 고장의 음식 범주에 갇혀 있었다. 70년대 언론이 다룬 음식 관련 프로그램은 고작 요리교실 정도였다. 70년대 조선왕조 궁중음식으로 인간문화재가 된 황혜성과 그의 딸 한복녀·한복선·한복진, 1954년 수도가정요리학원(현 하선정 요리학원)을 세운 하선정과 이종임 등 여성요리연구가가 국내 첫 쿡방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맛집 뉴스는 여전히 언론의 사냥감이 아니었다.

표성흠 ‘韓 첫 레저관광가이드북’主役
80년 한국일보가 펴낸 ‘한국의 여로’
15권 걸쳐 길·숙박·음식정보 집대성
삼숙이탕·도리뱅뱅이·인삼어죽 등
無名 음식 특징 살린 작명도 수두룩

소설 ‘장군의 아들’ 작가 백파 홍성유
별미 찾아다니며 전하는 일에도 애착
주간조선에 ‘식도락기행’ 연재 모아
87·99년 이어 ‘한국 맛있는 집’ 출간

◆한국일보의 ‘한국의 여로’

198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한국인의 입맛도 점점 컬러풀해지기 시작한다. 관광·레저·여행문화가 기지개를 켠 덕분이다. 그 흐름을 미리 감지한 한국일보가 80년에 한 질 15권짜리 ‘한국의 여로’를 펴낸다. 기념비적이었다. 제작비 상당 부분은 작고한 앙드레 김이 떠안았다. 한국의 첫 레저·관광가이드북으로 기록되기도 하는 이 책은 갓 등장하기 시작한 드라이브족·미식가 등을 위해 길·숙박·음식 정보를 집대성했다.

금상첨화로 해외여행자유화가 시작된다. 70년대에는 해외여행 목적의 여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83년 1월1일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하여 200만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 관광여권을 발급하였다. 사상 최초로 관광목적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이다. 해외여행의 전면적 자유화는 89년에 이루어졌다.

‘한국의 여로’를 바탕으로 월간지 ‘마당’도 전국가이드북을 출간한다. ‘한국의 여로’ 제작에 관여했던 소설가 표성흠씨는 한국일보를 나와 일요신문 레저전문기자로 활약한다. 83년 소설가 중에서는 최인호 다음으로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한다. 표씨는 여러 여행사와 윈윈전략을 짜고 전국을 유람하며 드라이브 코스별 맛집 정보를 주말마다 알려주었다. 78년부터 소설가 김동리의 권유로 ‘월간문학’에 식도락 여행기를 연재했던 소설가 백파 홍성유는 홍승면과 표성흠이 알려준 맛집 등을 토대로 전국별미기행에 나선다. 표씨는 백파와 자주 정보를 교류했다. 이런 흐름 위에서 90년대 초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 간)를 띄울 수 있었다.

표씨가 기자에게 그때 사정이 담긴 회고담을 e메일로 보내왔다.

그는 경남 거창에서 고교 선생을 하다가 소설 공부를 위해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 편입학을 했다. 그때가 77년이다. 78년 여름방학 때 낙동강 뗏목 타기를 시도한다. 그 기록을 월간 ‘학원’지에 연재한다. 이 기사들을 봤다며 한국일보사 출판국에서 그를 특채했다. ‘한국의 여로’라는 책을 기획하면서 취재기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나온 관광가이드북이다. 가볼 만한 곳, 숙박, 음식 특산물 순으로 편집됐다. 취재차 전국을 몇 바퀴 돌았다.

이후 소설가가 되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 일요신문 레저기자로 발탁돼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치르는 동안 드라이브·등산·낚시·맛있는 집 등을 취재하러 또다시 전국일주를 몇 번 한다. 86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부터 ‘맛있는 집’이 점점 인기를 누린다. 식도락을 즐길 만한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 변천사가 재미있어요. 70년대엔 맛있는 집을 찾으려면 군청이나 읍사무소 근방의 오래된 집을 찾으라 했어요. 그다음이 기사식당이죠. 이 때까지는 질보다는 양이 우선이었습니다. 80년대 들어서며 창녕 양지발 향어회가 인기를 누렸어요. 곧이어 향어에 기생충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송어가 나옵니다. 아시안게임을 치를 즈음 해선 이 메뉴를 누르고 ‘역돔’이란 놈이 등장해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올림픽을 치르면서 보신탕에 대한 반감이 불거지고 대안책으로 신토불이 토종닭과 채식이 등장합니다.”

여기까지는 식도락이라기보다는 별미여행 정도였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 거리에 관계없이 식도락을 즐기러 다녔다. 같은 회를 먹어도 섬세하게 다져야 하는 세꼬시와 텀벙텀벙 막 썰어내는 막썰이회파가 나뉜다. 같은 돼지고기를 먹어도 배 속에서 갓 꺼낸 새끼돼지 요리인 ‘애저찜’을 찾는 팀과 돼지껍데기를 구운 수구레를 먹는 팀으로 갈라진다. 주머니 사정에 따른 양극화다. 그는 백파 홍성유보다 앞서 반 세기 동안 신문 잡지 방송 레저전문원고를 집필하며 살았다.

표씨는 일요신문에 있을 때 흥미로운 음식 이름을 많이 작명했다. 강릉의 대표적 해물탕 중 하나인 ‘삼숙이탕’, 강원도 홍천의 ‘엄나무백숙’, 충북 영동의 ‘도리뱅뱅이’, 금산의 ‘인삼어죽’, 거제도의 ‘막썰이회’, 부산의 ‘세꼬시’ 등 제대로 된 메뉴명이 없던 음식의 특징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 재미있는 메뉴명을 만들어주어 이젠 그 이름이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그 덕분에 국도는 물론 지방도로까지 훤히 꿰차고 있다. 지금도 내비게이션 없이 다닌다. 그러나 그는 여행 관련 30여권의 책을 낸 기자였지 식도락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음식은 먹고 살 만큼 섭취하는 것이지 사치 부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일요신문을 나온 표씨는 1인 레저전문기사집필실로 불렸던 ‘길손기획’을 창업한다. 그가 만든 별책부록만 40여권에 달한다. 그 어름에 앙드레 김이 간여한 여행전문 가이드북의 신지평을 열었던 ‘나그네’가 창간된다. 거기에 글을 연재했던 김홍성·박인식씨는 산꾼들을 위한 맛집을 소개했다. 낚시와 등산 관련 잡지는 조선일보가 독점하다시피 한다. 뒷날 97년 1월호 우촌 박재곤씨가 조선일보에서 펴내는 ‘월간 산’에서 ‘산따라 맛따라’란 음식칼럼을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다. 표씨의 노력으로 90년대 중반에 국내 첫 여행작가협회가 태어난다. 유연태·송일봉씨 등이 초창기 맹활약을 한다.

◆백파 홍성유의 ‘별미기행’

식객 칼럼니스트 1세대로 가장 인기를 누린 사람은 역시 백파 홍성유(1928~2002). 2002년 작고한 그는 미식가라기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던 식도락가형 작가였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장군의 아들’ 작가로 잘 알려진 백파는 서울 토박이로 10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중학시절에는 유도를 배우기도 하였고 형과 매형들 어깨너머로 마작도 배웠다고 한다. 또 까부는 일본 학생을 때려눕혀 철창신세를 졌다. 그곳에서 고바야시라는 노름꾼을 만났으며 이로 인해 10년 후쯤부터 한동안 노름판을 전전한다. 훗날 그의 이런 경력 때문인지 그는 자타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타짜로 불린다. 실제 고스톱의 각종 법칙도 그가 정립했고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도 그를 국제적 타짜로 인정할 정도다.

그는 소설 쓰는 일 못지않게 별미를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가 맛본 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도 그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주간조선에 ‘백파 홍성유의 식도락기행’을 연재했다. 그 결과를 모아 87년 전국 각지의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한 ‘한국 맛있는 집 999점’에 이어 99년 ‘한국 맛있는 집 1234점’ 등을 발간했다. 그걸 토대로 한국의 제대로 된 음식칼럼니스트 1호로 불리는 김순경씨(76)가 2000년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을 출간할 수 있게 된다.

외식업계에 ‘다담회’라는 것이 있다. 가끔 유명한 식당에 가면 이 ‘다담회’ 간판이 걸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 ‘다담회’는 백파의 ‘별미기행’에 소개된 업소들 중 100여명의 식당 사장들이 93년 의기투합해 만든 모임이다. 백파가 우리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의 칼럼을 보면 좀 아쉬움이 남는다. 미식가 특유의 전문성도 덜 보이고, 뭐랄까 그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집을 찾아나선 일종의 음식 찾는 ‘주유산천기(周遊山川記)’로 보인다. 뒤에 등장하는 제대로 된 음식칼럼니스트인 김순경, 황광해, 황교익, 박정배 등에 비하면 내공이 한참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