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대구, 그리고 영남일보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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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6-24   |  발행일 2016-06-24 제33면   |  수정 2016-06-24
총성과 함께 ‘문학의 심장’ 박동하다
66년前 ‘전선문학의 산실’ 대구
20160624
1951년 대구 향촌동 모나미 다방에서 열린 이효상의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 6·25전쟁 당시 대구에 머문 문인들은 자신의 작품을 모아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향촌동의 다방은 출판기념회 단골 장소였다. <향촌문화관 제공>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여 잘 자라.’

가수 현인의 노래 ‘전우야 잘 자라’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발표됐다. 이 노래는 전쟁통에 울려 퍼지며 군인과 피란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노랫말 속의 비유는 과장이 아니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을 생생하게 드러낸 증언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한 번이 아니라 넘고 넘어 여러번, 그것도 비켜가지 않고 그대로 밟고 넘어야 하는 처절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기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은 건 군인들만이 아니었다. 문인들 역시 총 대신 펜을 들고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야 했다. 더러는 포연에 휩싸인 전장 속으로 종군했고, 더러는 전란의 심연 가까이에서 시대의 참상을 기록했다. 그들의 명징한 기록은 ‘전선문학’이라 불리며 한국문학사의 큰 축으로 남았다.

그 시절 문인들이 둥지를 틀고 명징한 기록을 써내려 간 곳, ‘전선문학의 산실’이 바로 대구다. 수많은 작품들을 온전히 담아 ‘전선문학의 전성기’를 이끈 신문이 영남일보였다. 6·25전쟁 발발 66주년, 전선문학의 역사는 우리가 다시 되새기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역사다.

총 대신 펜 들고 전쟁 한가운데 선 문인들
戰場과 전란의 심연 가까이서 참상 기록

악화된 전세에 문총구국대 본부 대구로
그 시절 3개월 쓴 작품 ‘전선문학’ 구축
1·4후퇴後 또 한번 ‘문단 거점’ 대구생활
피란문인 주축 국내 첫 예술학원 설립도


◆전쟁 초기 문총구국대의 안식처 대구

6·25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문단은 비상체제로 편성됐다. 문인들은 한강철교가 폭파되기전 서울을 급히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곧장 임시수도인 대전에 집결해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결성한다. 문총구국대 결성은 조지훈이 주도했다. 단원으로는 김광섭, 이헌구, 서정주, 서정태, 김송, 박목월, 조영암, 박연희, 이한직, 박노석, 박화목, 조흔파, 구상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국군 정훈국 소속으로 전쟁의 참화를 몸소 받아들이며 펜을 들었다. 대전에서 발족한 문총구국대는 곧바로 시인 이한직을 대구로 파견해 후방 문인들에게 뜻을 함께할 것을 촉구했다.

대구에서는 이효상을 지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윤수, 김사엽, 김진태, 최계복, 강영기, 김영달, 조상원, 백락종, 유기영, 김동사, 최해룡, 박양균, 신동집, 이호우 등으로 구성된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를 발족했다. 경북지대가 결성된 곳이 바로 대구 서문로의 막걸리집 ‘감나무집’이었다.

날이 갈수록 전세는 악화됐다. 결국 대전에 있던 문총구국대 본부도 피란길에 나서야 했고 그들이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대구였다. 대구로 내려온 문총구국대는 문총 경북지대 문인들과 합류하면서 본격적 활동에 들어갔다. 대민방송의 원고를 쓰고, 위문공연과 시국강연을 열었다.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시대의 참상을 위로하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포스터와 전단, 표어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 시절 그들이 쓴 수많은 작품은 지금 ‘전선문학’으로 불리며 역사로 남았다.

문총구국대 일부 문인은 국군을 따라 종군하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목격한 전쟁은 처절하고 참혹했다. 시인 구상과 함께 종군해 김천 전투를 목격한 서정주는 결국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대구를 떠나야 했다. 다부동 전투에 종군했던 조지훈은 이 시절 그의 대표작 ‘다부동에서’를 썼다. 문인들은 약 3개월 동안 대구에 머물렀다. 낙동강 전투에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종군했고, 피란 문인들은 썰물처럼 대구를 빠져나갔다.

◆1·4후퇴후 종군작가단의 거점 대구

1951년 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뒤바뀌었다. 서울로 돌아갔던 문인들은 또 한번 피란 보따리를 싸야 했다. 문인들은 피란민들로 엉겨붙은 열차에 올라야 했고, 그들을 실은 열차가 도착한 곳은 전쟁초기 머물렀던 대구였다. 9·28서울 수복 후 해산한 문총구국대는 1·4후퇴 이후 육·해·공군별로 종군작가(문인)단을 결성해 활동을 재개했다. 그 거점이 대구였다.

가장 먼저 공군종군문인단(空軍從軍文人團), 일명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가 1951년 3월 대구에서 조직됐다.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 조지훈, 사무국장은 최인욱이 맡았다. 최정희·곽하신·박두진·박목월·김윤성·유주현·이한직 등이 주축이 됐다. 발족 1년 후인 1952년에는 황순원·김동리·전숙희·박훈산 등을 새로 영입했다.

창공구락부는 조종사들과 일상생활을 같이하며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작품 낭독회와 예술제 등 문예대회도 개최했다. 소설가 최인욱이 각색하고 최은희, 황정순 등이 출연한 ‘날개 춘향전’은 장병과 민간인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공연이 열린 대구 국립극장은 연극을 보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였다. 전쟁 속에서 문학과 예술은 유일한 위안이었고, 사기를 북돋워주는 무기나 다름없었다.

창공구락부가 조직되고 두 달 후인 5월26일에는 ‘육군종군작가단’이 결성됐다. 작가단에는 정비석, 박인환, 양명문, 그리고 출판관계 인사들과 만화가까지 합세했다. 육군종군작가단이 발족한 곳은 아카데미극장 골목에 있던 ‘아담(雅淡) 다방’이었다. 발족 당시 단장은 최상덕이 맡았다. 부단장에는 김송, 상임위원에는 최태응, 박영준, 이덕진 등이 임명됐다. 단원으로는 장덕조·최태응·조영암·정비석·김진수·정운삼·성기원·박인환·방기환 등이 주축이었다. 시인 구상은 그해 12월1일 새롭게 합류해 부단장을 맡았다. 육군종군작가단 역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며 전쟁을 기록하고 애국심을 진작시키는 글을 쏟아냈다.

문인들이 발표한 작품들은 전쟁 중에 출판되기도 했고, 그들이 드나들었던 향촌동 다방은 출판기념회 장소로 쓰였다. 1951년 10월에는 피란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국내 최초 예술학원인 ‘상고예술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남산동 교남학교를 학원 교사로 정하고 문학, 음악, 미술 3개 학과를 운영했다.

전란의 피폐함 속에서도 문인들은 대구에서 다시 문학의 꽃을 피웠고, 대구는 당시 한국문단의 거점 역할을 했다. 대구가 전선문학의 산실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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