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③서세일 고베 테크노플로우원 대표

  • 백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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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09   |  발행일 2016-08-09 제6면   |  수정 2022-05-18 17:37
“부친 신발사업 이어받아 자동차·전자·건축 영역으로 사업 확장”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③서세일 고베 테크노플로우원 대표
서세일 테크노플로우원 대표의 자택 1층에는 ‘비밀의 공간’이 있다. 그는 이곳에 항공기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갖춰놓고 틈날 때마다 시간을 보낸다.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③서세일 고베 테크노플로우원 대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혹은 일본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재일 조선인’들은 목숨을 걸다시피 해서 인생이라는 밭을 일구었다. 스스로 또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온 ‘1세’가 밭에 씨를 뿌렸다면, ‘2세’는 정성들여 물을 주고 키워나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꿈은 접어둬야만 했다. 고베에서 첨단 소재 관련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서세일 테크노플로우원 대표(54)는 아버지가 시작한 사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인물이다. 서 대표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전략적으로 개척 중인 인물이다.

운동화 천 잇는 기술에서 시작
열전도율 뛰어난 알루미늄테이프
사진 인화 특수코팅지 기술 개발

1975년 경북관광개발공사 설립때
서 대표의 부친이 5만달러 기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서세일 테크노플로우원 대표의 부친(1928년생)은 당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계를 위해 자녀를 다른 집에 맡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5남매 중 서 대표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서 대표는 “아마도 집안 사람 중 누군가가 일본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며 “하지만 이후 제사 등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서 대표의 부친은 제철소 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며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베에 정착한 서 대표의 아버지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재봉틀을 보고는 무릎을 쳤다.

서 대표는 “마침 고베에서 신발산업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 등의 영향으로 수출 역시 활기를 보였다”며 “아버지께서는 운동화 봉제 기술을 배워서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단순히 재봉을 하는 것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을 이어 붙이는 접착 기술이 중요했는데, 블루오션임을 직감한 그의 아버지가 이 부문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1949년에 작은 공장까지 세우고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업계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서 대표는 “(아버지는) 틈 날 때마다 ‘핵심은 기술’이라고 강조하셨다. 단순히 신발을 만드는 회사가 아닌 코팅이나 라미네이트 기술을 보유한 회사로 포지셔닝하길 원하셨다”고 회상했다.

수출 위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은 이러한 맥락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기업 사정이 변화무쌍한 시장 상황에 따라 요동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수출의 비중을 줄이고 기술 개발과 사업 영역 확장에 나서며 내실을 다졌던 게 사업의 성공 비결인 셈이다.

서 대표는 “아버지는 사업을 성공 궤도 위에 올려 놓는 과정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행운도 따랐다. 출장이 하루 미뤄지는 바람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피하기도 했다”고 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살핀 게 성공비결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은 서 대표는 크게 ‘신발 관련 기술’과 ‘탈 신발 관련 기술’을 함께 개발해 나갔다.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일례로 테크노플로우원은 신발 깔창 등에 쓰던 첨단 기술을 접목시켜 휴대폰 등에 쓰이는 액정용 보호필름 제작 기술을 개발했다.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의 1에 불과한 두께이면서도 충격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해 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때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가격경쟁이 치열해 철수한 상태라고 한다.

서 대표는 기업이 덩치를 키울 수 있었던 ‘핫 아이템’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그는 “냉장고 뒷부분에 있는 부품을 이어 붙이는 등의 용도로 알루미늄 테이프가 쓰이는데 열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 업체는 열 전도율이 뛰어난 접착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냈고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 업체는 사진을 인화할 때 표면에 입혀지는 특수한 코팅지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이를 눈여겨 본 대기업과 손을 맞잡고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의 발판은 모두 사업 초창기 운동화 천을 잇는 접착 기술에서 비롯됐다.

서 대표는 “일본에서는 아기가 생후 처음으로 신는 신발을 최대한 좋은 제품으로 마련한다. 우리 회사의 접착 기술을 ‘생애 첫 신발’을 제작하는 업체에서 매력적으로 느꼈고 함께 일을 했다”며 “이후 신발 부문에서 시작한 사업 영역은 자동차, 건축, 전자 등 여러 영역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기본은 ‘바른다, 붙인다’는 접착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마음속에는 항상 조국에 기여하겠다는 생각

서 대표와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기업가로 살면서 조국(한국)의 산업을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서 대표의 부친은 1975년, 지금의 경북관광개발공사에 설립 기금으로 5만달러 정도를 선뜻 내놨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했던 그의 부친은 1979년 조국으로부터 훈장(동백장)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서 대표의 부친은 교육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그는 고향인 김천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를 사서 기부하기도 했다.

서 대표 역시 한국인임에도 일본에서 일하는 기업가의 의무를 충실히 지켜나갔다. 그는 “부친께서는 ‘일본에서 기업을 운영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며 “납세 의무를 잘 지켰다며 ‘우량신고법인’ 표창을 받기도 했다. 재일교포 기업 중에서 1% 정도만 받을 정도”라고 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사진=<사>인문사회연구소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PRIDE 경상북도


■ 키워드로 읽는 在日조선인의 삶-‘한국인 아닌 한국인’
“한국 국적이라 항공대 입학 못했지만 美 유학생활 중 조종사 면허 취득”

파일럿 꿈꿨던 서세일 대표

비록 성공한 기업가로 이름을 날리고는 있지만, 사실 서세일 테크노플로우원 대표의 꿈은 파일럿이었다.

서 대표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종종 비행기를 탔는데 반해버리고 말았다. 어떤 여성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나. 그것과 같다”며 쑥스러워했다. 이어 “비행기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탈 때의 감각 등 이런 것들이 다 좋았다. 인간은 스스로 걷고 또 헤엄칠 수도 있지만 날지는 못한다. 이것도 매력 포인트”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서 대표는 꿈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한국 국적을 갖고서는 일본의 항공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후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까지 학업에서 손을 놓았다. 그에게는 큰 상처였다.

재일조선인 2세로서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도 못했다. 서 대표는 “아버지가 정한 대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대학에 못 갔지만,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덕분에 싹텄다. 대학 졸업을 앞둔 서 대표에게 그의 부친은 미국 유학행을 제의했다.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경영학을 좀더 공부하길 바랐던 것이다. 이는 오히려 서 대표에게 꿈을 살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미국 유학 생활 틈틈이 준비해서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땄다.

서 대표는 “(조종사) 자격을 따면서 생각했던 게 있다. 바로 회사가 탄탄하게 기반을 잡도록 만든 뒤 (항공기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 테크노플로우원은 ‘사이드 비즈니스’로 항공기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항공기 조종사나 지망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사무실 한 개 층에 시뮬레이션 체험장을 조성 중이다. 운명도 그의 의지를 막지는 못한 셈이다.

서 대표는 “대형 항공기에 들어가는 니켈 시트의 접착보조제를 납품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꿈에 가까운 일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또 항공기 디스플레이 부문에 뛰어들 수 있을지도 점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서 대표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민’인가?”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난 고베시민이다. 고베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울 것”이라면서 “한국이 조국이면 일본은 모국”이라고 말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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