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밀정’의 여주인공 연계순과 현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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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2   |  발행일 2016-09-22 제30면   |  수정 2016-09-22
20160922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뛰어난 미모 가진 대구 기생
현정건 만나 ‘인생의 전환점’
의열단 가입 항일무장 투쟁
최근 영화 상영 통해 알려져
대구여성 이야기 더 발굴을


항일무장결사체인 의열단의 활동을 조명한 영화 ‘밀정’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뜨겁다. 개봉 기간 중 추석연휴가 끼어있는 특수를 누리긴 했지만 초단기간 600만명을 거뜬히 넘어선 후 천만흥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영화가 실제 인물들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영화 주인공들이 분한 실제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다. 그중 영화 속 여주인공 ‘연계순’은 미모와 지략을 갖추었으며, 외국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폭탄과 권총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담대한 기개를 지닌 여성 의열단원으로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한 여성인물이 떠올랐다. 바로 대구 출신 현계옥(1897~?)이다. 달성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현계옥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 때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타고난 미모에다 풍류가무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당시 소리와 산조, 춤과 가야금에는 그녀와 대적할 만한 이가 없어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이처럼 당대 명기로서 이름을 떨쳤던 현계옥이 삶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현정건과의 운명적 만남이 계기가 된다. 현정건은 ‘운수좋은 날’ ‘빈처’ ‘술 권하는 사회’로 유명한 현진건의 사촌형으로, 일본과 중국 등에서 유학한 인텔리였다. 고향인 대구에 들렀을 때 친구와 어울려 갔던 기생집에서 현계옥을 만나 연인 사이가 된다. 당시 현정건은 이미 15세에 조혼한 두 살 위의 부인이 있었지만 부부사이는 서먹했다고 한다. 현계옥은 19세 때 연인 현정건을 따라 경성의 한남권번으로 옮기기까지 했지만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나버린다. 현계옥이 독립운동가로 나서게 된 것은 이듬해 현정건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몰래 서울로 잠입했을 때였다. “나를 애인으로 혹은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해 달라”며 결심을 털어놓고 애국동지의 길을 걷게 된다.

3·1운동 이후 현계옥은 21세의 나이로 현정건을 따라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떠나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그녀는 의열단장인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제조법과 육혈포 놓는 법을 배웠고, 여성의 이점을 살려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목숨을 건 비밀공작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현계옥은 특히 외국어에 능통했는데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까지 유창하게 해 폭탄을 운반하는 등 중요한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한번은 중국 톈진에 있는 폭탄을 상하이로 운반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는데, 관헌의 취조가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사람 옆으로 가서 말을 걸어 부부가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 정도로 외국어 실력과 기지가 뛰어났다. 이러한 일화를 모티브로 영화 속 연계순이 서양인과 부부로 위장하는 장면이 등장하게 된 것 같다.

1928년 서른 살 되던 해 현정건이 상하이에서 옥고를 치른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현계옥은 시베리아로 망명한다. 연계순이 고문 끝에 옥사하는 것과는 다른 결말이다. 이후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대학을 졸업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녀의 소식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흑백사진 속 현계옥의 모습을 보면, 영화 속 한지민처럼 작고 가냘프지는 않다. 기록에도 “남자처럼 승마복을 입고 모자를 둘러쓰고 높은 말 위에 앉아 살같이 달리는 늠름한 모양은 완연히 여장군의 풍도가 있었다”고 전하며, 매일신보(1918년 3월5일자) 기사에도 “현계옥 같은 체격은 여간 남자들보다도 당당하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화를 통해서 대구 여성 현계옥의 행적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많은 대구여성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묻혀 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지역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기록하고 다양한 콘텐츠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아카이브를 구축해 현재로 생생하게 불러내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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