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닭요리 변천사 - 닭도리탕에서 안동찜닭까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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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8   |  발행일 2017-08-18 제41면   |  수정 2017-08-18
닭볶음탕·안동찜닭의 원형은 班家(반가)의 제사음식 ‘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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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을 첨가시킨 돈마을의 ‘솔잎조림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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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을 베이스로 한 ‘안동찜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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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닭에 다진 마늘을 넣은 주영자마늘닭의 ‘마늘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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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식 매콤찜닭의 기수인 또이스의 ‘찜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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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닭도리탕 같은 ‘앞산철판찜닭’.

달구벌. 이젠 국제적 ‘치킨시티(Chicken city)’. 2013년발 ‘대구치맥페스티벌’ 덕분에 대구는 동북아에서 가장 다양한 닭 관련 음식라인을 갖게 됐다. 하지만 닭은 우리닭보다 외국닭 세상이다. 지금 우리가 먹는 닭은 거의 외래종. 미국에서 들어온 종자다. 미국은 엄청난 치킨 강국이다. 치킨이란 말이 그들 삶에 녹아들어가 있다. ‘모든 냄비에 치킨을(Chicken in every pot)’, 1928년 미국 공화당 슬로건이다. ‘까기도 전에 병아리부터 세지 말라’(Don’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 are hatched)’란 속담에도 닭이 들어가 있다.

아무튼 닭세상이 ‘치킨세상’으로 변한 건 1977년 무렵이다. 84년 한국에 들어온 KFC 전신인 ‘림스치킨’. 그게 국내 첫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로 등장한 것이다. 그건 대구통닭~맥시칸양념치킨~교촌 등이 촉발시킨 대구발 프라이드치킨과 레시피나 맛이 사뭇 다르다. 사실 백숙시대는 삼계탕으로 번졌고 그게 궁중닭백숙으로 진화된다. 그런데 어느날 ‘튀김닭’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프라이드치킨’이란 말이 보편화된다. 다시 말해 삶은 건 닭, 튀긴 건 치킨이란 등식이 성립된 것. 그런데 옛날통닭만은 흥미롭게도 튀겼음에도 여전히 ‘닭’이란 말이라야 더 맛있어 보인다. 지금 별별 닭요리가 대구에서 대박을 칠 수 있었던 건 일제강점기 구축됐던 강력한 양계산업의 영향 아닌지 모르겠다.

◆전국 최강 대구양계벨트

양계산업에서 입지조건학적으로 볼 때 대구 이상의 적지도 없다.

그시절 대구는 서울 다음으로 돈이 많이 나돌았다. 또한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을 양대산맥으로 한 숱한 전통시장이 포진하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망도 대구권과 잘 맞아들어갔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근대양계산업의 주요 인프라는 일제강점기에 대거 대구로 몰려든다.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부화장은 북구 산격동에 있었던 ‘신기부화장’이다. 그 때만 해도 한국 토종닭이 단절되진 않았다. 하지만 61년쯤 미국계 닭인 하바드 종자가 대량 국내로 밀려들면서 치명타를 맞는다.


일제 땐 양계·지금은 치맥의 메카 대구
60∼70년대엔 범어동이 최고 양계특구
80년대 아파트시대 맞물려 외곽 이전

‘禮書’에 적힌 ‘편적’ 중 하나인 鷄炙
온마리 닭 삶아 간장을 발라 조린 제물
남성이 만들고 간장조림닭 닮은 게 특징
간장 활용따라 닭볶음탕·안동찜닭으로



박정희 대통령 주도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양계산업도 본격화된다. 6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양계산업’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68년에 ‘대한양계협회’가 결성되고 첫 양계 전문잡지인 ‘현대양계’도 창간된다. 계란산업 특수로 인해 산란닭 수요가 폭증한다. 대구 전역에서 양계장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그 시절 대구양계산업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대구 양계1·2세대가 있다. 박세탁씨(영천에서 ‘흥생농장’ 운영), 권진택씨(성주군에서 ‘오성농장’ 운영), 송인환씨(칠곡에서 ‘성진양계장’ 운영)와 이들의 뒤를 이은 배신국씨(고령에서 토종닭인 ‘우리품닭’ 집단 사육) 등이다.

박씨를 비롯한 몇 명의 양계인이 60년대초 현재 범어네거리 동쪽 언덕배기에서 ‘농장형 양계장 시대’를 연다. 건너편 현재 동도초등학교권까지 양계장권이었다. 범어동과 그 옆 황금동권 야산은 순식간에 ‘양계장특구’로 자리를 잡게 된다.

양계장은 부화장과 맞물려 돌아갔다. 75년 기준해 대구 시내에는 48개의 부화장이 있었다. 수성교 근처에는 대구·신성부화장이 있었다. 지금은 수만, 수십만 수를 하지만 그때는 다들 200·300수 정도만 키울 정도로 영세했다.

병아리를 5개월 정도 키우면 산란계가 되고 그때부터 1년 남짓 계란을 낳은 뒤 기능을 다하면 ‘폐계(노계)’가 된다. 닭은 삼복철 등 특별한 날에만 보양식으로 잡아먹었다. 평소에는 계란이 요긴한 시절이었다. 아낙네들은 양계장에서 계란을 받아와 부산 재첩국아줌마처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파트 시대가 도래했다. 범어·황금동이 매머드급 아파트촌으로 변하자 도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성구 시지동과 매호동, 나중엔 경산·성주·영천·청도권으로 이전한다. 현재 대구 도심에는 양계장이 단 한 곳도 없다.

◆문둥병닭 이야기

13년 서구 내당동 반고개 북쪽 언덕배기에 대구 첫 대구나환자병원이 생긴다. 24년 오픈한 ‘애락원(愛樂園)’이다. 95년 나병전문병동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애락원은 칠곡군 신동면 신동재 언저리 ‘애생원(愛生園)’과 함께 지역 양계산업의 한 축을 담당한다. 62년 5월 보사부의 새로운 복지정책 때문이다. 나병환자의 사회적응을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것. 80년 10월30일 기준 전국에는 무려 98개 나환자 정착촌이 있었다. 칠곡 애생원 산하에는 낙산농장과 칠곡농장이 있었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대구역 한편에선 시도때도 없이 ‘꼬끼요~’ 소리가 들렸다. ‘닭장열차’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대구권 양계사업이 서울과 원활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서울역에 농축산물 진흥관이 설립된다. 그 시절 대구에선 닭똥도 돈이었다. 양계장 등을 돌면서 닭똥만 수거해 팔러 다니는 장사치들도 적잖았다.

시대가 또 변한다. 80년대 후반부터 도심 양계시설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양계산업 인프라는 점차 비교적 지가가 싸고 공해와 연료문제가 적은 전라도 등지로 옮겨간다. 대표적인 게 익산에 둥지를 튼 ‘하림’이다. 대구 양계업계는 가공산업이 아닌 유통산업으로 유턴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구에선 닭 대신 ‘치킨’이란 말이 더 보편화된다.

◆계적은 대구닭의 자존심

대구는 ‘육개장’의 발상지. 육개장의 선조는 보신탕. 그 보신탕 고기와 육질이 비슷한 게 바로 닭이다. 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 갖은 채소류와 섞어 국을 끓이면 그게 ‘닭개장’이다. 대구만큼 닭개장을 즐기는 데도 없다. 닭개장은 ‘닭으로 만든 육개장’이란 뜻이다. 요즘 메뉴판에 ‘닭계장’이라 적어놓은 데가 많은데 틀린 표기다. 지역에서 닭개장을 제대로 하는 식당은 북구 고성동 ‘진국육개장’, 동구 불로시장 입구에 있는 ‘경주보양탕’ 등이다.

경상도 반가에선 유달리 ‘계적(鷄炙)’을 선호한다. 계적은 일명 ‘도적’. 대구는 안동권과 비슷하게 도적을 주된 제물로 여긴다. 도적도 세 종류가 있다. 예서(禮書)에는 ‘편적(片炙)’이라고 하여 ‘계적(닭)·육적(소고기)·어적(생선)’, 이 세 가지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 이들 3적을 모아서 적틀(炙臺)에 고임 형태로 높이 쌓는 걸 도적이라고 부른다. 무려 40㎝ 높이의 도적도 있다. 다른 제물과 달리 도적은 남성들이 직접 마련한다. 특히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는 기제사 때 계적을 빠트리지 않는다. 온 마리 닭을 가볍게 삶은 뒤 토간장을 네 차례 발라 연거푸 조려낸다. 간이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언뜻 ‘간장조림닭’ 같다.

이 흐름과 관련된 세 업소가 있다. 소피국으로 유명한 ‘대덕식당’과 남구 대명6동 한정식 ‘솔내음’, 그리고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돈마을’이다.

특히 호남음식 대구화의 리더격인 솔내음의 박진숙 사장은 대구식 닭요리의 무한한 변신을 보여준다. 대덕식당과 달리 통마리를 조리지 않고 반 마리씩으로 토막내고 더 걸쭉한 소스로 40분 정도의 더 짧은 시간에 조려내는 게 특징이다. 최근 문어·전복을 넣은 퓨전 궁중닭백숙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해계탕(海鷄湯)’까지 개발했다.

이런 계적이 근대화 과정에서 다양하게 분화하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닭도리탕(닭볶음탕)’과 ‘안동찜닭’이다.

◆닭도리탕과 찜닭의 함수관계

요즘 안동찜닭 위세가 대단하다. 어떤 이는 안동을 찜닭의 고향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다. 연원을 파고들면 안동찜닭 훨씬 이전에 ‘대구발 닭도리탕(닭볶음탕)’이 있었다. 안동시 서부동 안동구시장에 가면 골목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찜닭골목’이 나온다. 70년대만 해도 생닭과 튀김통닭이 있는 통닭골목이었다. 튀긴 통닭에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버무려 맵고 칼칼한 맛을 내는 ‘마늘통닭’이 대세였다. 80년대 초반까지 상승세를 탔지만 대형 프라이드치킨한테 밀린다. 통닭식당주들은 신메뉴가 절실했다. 기존 닭볶음탕을 응용해 갈비찜 양념에 채소와 당면을 넣어 간장을 베이스로 한 새로운 ‘야채찜닭’을 개발한다. 현재 마늘통닭은 안동에서는 명맥이 끊어진 상태. 대신 의성군 단촌면사무소 근처에 가면 볼 수 있다. 20년 역사의 ‘주영자마늘닭(옛 삼미통닭)’이다.

안동찜닭의 신화를 만든 브랜드는 2000년 서울 홍대 앞에 등장한 ‘봉추’. 안동찜닭의 역사는 채 20년도 안 된다. 그 배후를 알려고 하면 대구에서 처음으로 매콤한 닭도리탕이 등장한 70년으로 거슬러 가야 된다. 앞산 안지랑계곡은 매콤한 닭도리탕의 발상지다. 당시 거기엔 무허가 닭도리탕집이 즐비했다. 닭도리탕은 동촌·강창·청천·화원·옥포용연사권의 ‘매운탕’, 도심의 ‘불고기’와 함께 ‘그시절 회식 메뉴 1번’이었다.

안지랑계곡 입구에 앉아 있는 대덕식당. 그 이전에는 북한 출신의 포수가 경영하는 ‘맹산옻닭집’이 있었다. 이 식당이 지역 첫 옻닭 전문점이다. 현재 그 전통은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토담집’이 잇고 있다.

닭도리탕은 달달한 갈비찜을 매콤하게 변화시킨 동인동찜갈비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기존 고춧가루와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밍밍한 닭백숙은 주당들의 안주로는 뭔가 부족했다. 새로운 닭요리가 필요했다. 토막낸 절육에 청양고추와 큼직하게 썬 감자, 마늘과 고추장, 양배추 등을 넣고 닭볶음탕으로 변용시킨 것이다. 현재 앞산 닭도리탕 전통은 안지랑계곡이 공원화되면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 시절 메뉴를 팔고 있는 데가 한 곳 있는데 상인동 ‘과수원집’이다.

닭도리탕은 간장을 베이스로 하지 않는다. 안동찜닭은 매콤하지 않고 간장이 베이스다. 그런데 닭도리탕과 안동찜닭을 절충한 ‘대구식 찜닭’이 있는데 그게 바로 91년 계명대 대명캠퍼스 남문 근처에서 문을 연 매콤찜닭의 리더격인 ‘또이스’다. 최근 남구 대명9동 주민센터 옆에 등장한 ‘앞산철판찜닭’(사장 김성규)은 퓨전 대구식 닭도리탕으로 주목받는다. 김 사장은 “할머니가 해주던 간장이 들어가지 않은 추억의 대구식 닭도리탕을 부활시키고 싶었다”는 포부를 밝혔다. 기존 찜닭처럼 미리 요리해 쟁반에 담아내지 않고 오목한 무쇠철판에 손님이 직접 끓여 먹도록 했다. 감자 대신 가래떡을 넣고 기존 닭도리탕보다 국물이 많다. 꼭 ‘닭전골’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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