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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는 게 중론인 것 같다. 솔직한 감정표현은 각자의 개성이 중시되는 21세기 창조사회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내면의 감정이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창조성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개발서들도 대부분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라고 권한다.
직설적 감정표현을 강조하는 것은 다분히 서구문화의 영향이다. 서양사람들은 내면적 감정을 억제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개방하고 소통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반면 동양문화에서는 감정을 다스리고 정제해 일부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어왔다. 우리나라의 선비정신은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선비답지 못하다며 절제된 언행을 강조했다. 모든 언행에서 중용을 강조하는 중국 전통 문화도 마찬가지다. 일본어에서는 아예 진짜 속마음을 뜻하는 ‘혼네’와 외부 표현용인 ‘다테마에’를 구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정제되지 않는 혼네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서양인들은 이런 동양의 절제된 감정표현을 억압과 위선으로 보고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의 원인으로 치부하곤 한다.
과연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동양적 사고가 전근대적인 것일까. 감정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인간의 감정은 무수한 내외부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하다.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인간 내부의 육체적 심리적 상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사춘기의 반항심이나 갱년기 우울증은 내부 호르몬 변화에 따른 감정상태의 변화다. 또한 감정은 사회적 분위기는 물론 날씨나 공간 같은 환경 요소들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 흐린 가을 날에 괜히 우울해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무수한 내외부 요소들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감정이 형성되기 때문에 극도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감정은 객관적 사실과 상관없이 자기재생산적으로 증폭되는 수가 많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사실과 상관없이 이유없이 점점 더 싫어지게 된다. 따라서 감정은 반드시 이성으로 정제되고 절제되어 표현해야 한다.
감정의 무절제한 표현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한밤중에 혼자 감정에 북받쳐 쓴 일기를 대낮에 보면 낯 뜨거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한 사람의 감정표현이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계에서 감정의 직설적 표현은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무수한 비극적 다툼과 전쟁이 객관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닌 감정관리의 실패에서 시작됐다. 무엇보다 감정에는 사랑이나 행복, 즐거움 등 긍정적 요소들뿐 아니라 불안, 근심, 자기연민, 미움, 분노, 질투 등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들이 많다. 성서에서도 이런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발생하는 악한 결과를 경계하기 위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소설가 헤밍웨이의 ‘빙산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헤밍웨이는 복잡한 수식어를 최대한 줄이고 꼭 필요한 단어들만 단순한 단문형태로 표현하는 간결체를 완성했는데 특히 사실과 행동만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다른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복잡한 내면적 감정의 묘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글쓰기에서 감정표현은 빙산의 구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90%가 물속에 잠겨 있고 10%만 보이는 빙산처럼 절제되고 간결한 사실묘사를 통해 10%만 표현해도 독자가 나머지 90%를 느끼도록 해야 좋은 글이지, 모든 감정을 직접 묘사하는 것은 격이 낮은 글이라는 것이다.
최근 유엔 총회에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리용호 외무상 간 막말 교환이 화제다. 이들은 상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한 살벌한 막말을 교환해 평화가 목적인 유엔을 갈등 증폭의 장으로 전락시켰다. 상황에 따라 상대방에게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살벌한 막말이 동원되어야만 효과적인지는 의문이다. 국내 정치를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여야 간에 막말 수준의 저질 공방이 매일 되풀이되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적 발언을 하는 위치에 있는 리더들은 내면의 감정을 최대한 정제하여 간결하고 품위 있게 표현하는 절제된 언행의 가치와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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