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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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7   |  발행일 2018-08-17 제37면   |  수정 2018-09-21
세상 가장 아름다운 묘지 레콜레타, 국민이 가장 사랑한 에비타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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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콜레타 묘지. 에바 페론 묘역엔 늘 꽃이 가득하다(작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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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아테네오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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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9일 대로’의 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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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마데로 지역의 라플라타 강과 여인의 다리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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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장의 대통령 궁 ‘카사 로사다’.

하루를 꼬박 탱고에 잠겨 있었다. 탱고 말고도 BA(Buenos Aires)에는 보아야 할 것이 많았다. 아침 일찍 게스트 하우스를 나섰다. BA는 ‘7월9일 대로’를 중심으로 시가가 뻗어 있다. 7월9일 대로는 BA를 상징하는 왕복 20차로의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다.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높이 67m의 오벨리스크는 1936년 이 도시의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콘크리트로 4주 만에 완성한 이 건축물은 당시 파리의 에펠탑처럼 아름다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흉물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BA의 랜드마크다.

오벨리스크를 지나 BA의 중심인 ‘5월 광장(Plaza de Mayo)’을 찾았다. 1810년 5월25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5월 혁명’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몇 개의 지하철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인 이 광장은 대통령 궁과 대성당, 식민시대의 건물 등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이곳은 아르헨티나 국민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여드는 집회 장소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이다. 30년 넘게 목요일 오후 3시만 되면 흰색 스카프를 두르고 이 광장에 말없이 서 있는 자식 잃은 어머니들의 시위는 이제 이 도시의 일상이 되었다. 과거 아르헨티나 독재정권하에 3만여 명의 지식인과 청년이 사라졌다고 한다. 모두 침묵하고 굴종할 때, 어머니들은 ‘산 채로 나타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이 광장에 모였고, 그 시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는 세상 어디에서도 가장 위대한 이름이다.

대로 한가운데 흉물 취급 오벨리스크
에펠탑 못지않은 BA 랜드마크로 우뚝
독재하 자식 잃은 어머니시위 5월광장

분홍색집 의미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
궁 뒤쪽 운하 가로지르는 ‘여자의 다리’
탱고 추는 여인 다리처럼 매끈·역동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10’명성
가장 부촌 높은 지대에 만든 레콜레타
100년전 오페라 극장 엘 아테네오 서점
시내 크고 작은 서점만 730여곳 들어서
세상 편한 자세로 책읽는 인파 부러워


광장 중앙의 탑은 1811년 5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해 처음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00년이 지난 1911년에 중건된 것이다. 5월 광장의 북쪽에는 1827년 완성된 네오 클래식 양식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이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성당이라기보다는 법원이나 박물관처럼 보인다. 앞쪽에 12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것은 12사도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이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대통령 궁 ‘카사 로사다(Casa Rosada)’이다. 스페인어로 ‘분홍색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건물은 스페인 로코코 양식으로 19세기 말에 건축되었다. 정면에서는 2층 건물이지만,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4층 건물이다. 항구 근처의 비스듬한 언덕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통령 관저가 아닌 영해를 지키는 요새로 지어졌다. 건물 남쪽에 자리한 ‘카사 로사다 박물관(Museo de la Casa Rosada)’ 지하에는 지금도 라플라타 강을 향한 포와 포문이 존재한다. 5월 광장을 바라보는 카사 로사다 발코니에서는 페론 대통령 당시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와 나란히 서서 연설을 했으며,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5월 광장에는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대통령 궁 뒤쪽에는 푸에르트 마데로(Puerto Madero), 즉 항구 지역이 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던 이곳이 지금은 신흥지구로 개발되어 높은 땅값을 자랑한다. 이곳의 명물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여자의 다리’(Puente de la Mujer)다. 이 다리는 2001년에 만들어진 170m의 보행자 전용 다리다. 이름 때문인지 탱고를 추는 여자의 다리처럼 매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운하 양쪽의 산책길을 걷다가 박물관이나 레스토랑으로 개조된 함선들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다음 날 첫 일정은 레콜레타(Recoleta) 묘지였다. 레콜레타 지역은 1870년대 전염병이 돌자 부유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인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생긴 동네로, 지금도 BA의 가장 부촌이다. 묘지가 있던 자리는 원래 수도사들이 채소를 기르던 밭이었는데 1822년에 묘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인물이나 부자들은 모두 이곳에 묻혀 있다. 지금도 적게는 5억원에서 많게는 10억원 이상을 들여야 이곳에 묻힐 수 있다고 하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돈이 많이 드는 동네다. 프랑스 파리 도심의 공동묘지 페르라세즈를 떠올리게 하는 레콜레타는 BBC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10’의 명성답게 공원처럼 아름답게 정비되어 있었다. 무덤을 장식한 각종 대리석 조각과 비문들은 망자들의 권력과 부에 비례하기라도 하듯 화려하기도 소박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국민이 사랑하는 에바 페론, 그녀도 이곳에 묻혀 있다. 첩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던 미천한 소녀가 이 도시에서 영부인의 자리까지 올랐다. 여성에게 최초로 선거권을 부여하고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해 새벽 6시부터 밤 12까지 일했다. 그 시절, 원하면 누구든 그녀를 만날 수 있었기에 가난한 이들의 성녀로 불리기도 했다.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망친 여자라는 극단의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 국민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정치인이 바로 에바 페론이다. 그것은 에바 페론이 묻혀 있는 레콜레타 묘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와서 그녀의 묘지를 들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묘지의 장식으로 치자면 너무 소박해서 쉽게 찾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묘지에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그녀를 추모하는 꽃송이도 떨어지지 않는다. 정치적 결과를 떠나 진심으로 국민을 위했던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BA 5월 광장의 어머니들과 같은 슬픈 어머니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 국민 가슴속에 에비타와 같은 정치인이 있는지 반문해본다. 오히려 독재를 경제논리로 비호하지는 않았는지도 반문해본다. 잘살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나라에서 온 나는 못살게 되었지만 문화적, 정치적 자산이 많은 이 도시에서 은근히 기가 죽는다.

근처의 라틴아메리카미술관(MALBA)은 휴관일이어서 국립미술관(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에 들렀다. 이곳에서도 유럽에서처럼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외국의 미술관에 갈 때마다 이런 풍경이 낯설면서도 부러웠다.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이라는 명성을 지닌 콜론(Colon) 극장도 부러운 곳 가운데 하나다. 1857년에 완공된 이 극장은 유럽 등 북반구의 오페라 시즌이 끝나면 바통을 이어받아 남반구의 오페라 시즌을 시작하는 곳이다. 이 극장은 ‘세계에서 가장 음향이 좋은 오페라 극장’ 1위에 꼽히기도 했으며, 마리아 칼라스가 세계적인 프리 마돈나로 인정받은 곳이기도 하다. 극장 옆에는 거대한 보르헤스의 사진과 함께 그의 시구가 걸려 있었다. 이 도시의 문화적 축적을 과시하는 듯했다.

보르헤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그가 오랫동안 관장을 맡았던 팔레르모의 국립도서관을 찾았다. 보르헤스는 여덟 살에 단편소설을 쓴 천재 작가다. 도서관에서 태어나 도서관장으로 일했던 보르헤스는 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으나 결국 책을 읽다가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80만권의 책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준 신의 절묘한 아이러니”였던 것이다. 그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육각형 진열실이 끝없이 늘어선 거대한 도서관을 우주의 모습으로 치환하였듯이 도서관은 그의 일터이자 세계였다. 그가 관장으로 재직했던 국립도서관 앞뜰에는 보르헤스를 기리는 기념비가 자리 잡았고, 도서관 내부에도 보르헤스의 초상과 그가 쓰던 집기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보르헤스를 대하는 BA 시민의 자긍심이 느껴졌다.

이 도시에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여행객이라도 들러봐야 하는 서점이 있다. 번화가인 산 마르틴(San Martin) 거리에 있는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이다. 1919년 오페라 극장으로 출발한 이곳은 최초의 유성영화를 상영한 곳이기도 했으며, 라디오 방송국이 들어서서 20세기 초의 위대한 탱고 CD들이 녹음된 곳이기도 했다.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천장과 박스로 된 객석, 카페로 변한 무대, 육중한 자주색 커튼 등 오페라 극장의 흔적들이 원형 건물의 벽을 가득 메운 책들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곳에서는 박스 석의 가죽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책을 읽거나 카페로 변한 무대에서 배우처럼 차를 마실 수도 있다. BBC가 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10’에서 2위를 차지했단다. 공간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은 서가는 물론 서점 구석구석에서 자기만의 세상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는 인파였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오페라의 한 장면 같았다. 왜 BA를 문화예술의 도시로 꼽는지 알 것 같았다.

BA에는 730여 개의 서점이 있어서 세계에서 인구 대비 서점이 가장 많은 도시다. 중고 서적과 희귀본을 다루는 서점도 100개가 넘는단다. 실제로 도심을 지나다 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서점이 들어서 있다. 카페를 겸한 서점도 많다. 스마트폰의 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나라의 서점 상황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는 이 도시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한단다. 동감이다. 왜냐고? 예정했던 다른 여행지를 포기하고 장기 체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특히 감정을 꽁꽁 묶어두고 살았던 나 같은 여행자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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