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미나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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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08   |  발행일 2019-03-08 제41면   |  수정 2019-03-08
한재·정대·화원미나리 명성…웬만한 시름 녹이는 미나리에 감긴 삼겹살 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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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에서 시작된 미나리삼겹살 문화는 전국에 급속도로 확산됐다. 불판에서 익어가는 미나리 채향은 삼겹살의 기름 냄새와 합쳐져 형언할 수 없는 ‘음식삼매경’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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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가 손님상에 오르기 전에 쉽잖은 다듬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미나리철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용역회사를 통해 일손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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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읍 본리작목반의 하우스 안에서 미나리 수확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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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전부터 미나리 재배가 시작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미나리촌 전경. 현재 26명의 회원이 미나리를 재배하고 있다.

미나리. 언젠가부터 봄을 알리는 ‘신춘채(新春菜)’로 각광받는다. 한국발 봄미나리 신드롬은 1980년대쯤 청도 ‘한재’에서 발원됐다. 청도읍 초현리, 음지리, 평양리, 상리 일대를 한데 뭉쳐 한재라 한다. 남산과 화악산을 잇는 능선에서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계곡이다. 능선은 고개인데, 청도읍·풍각면·각남면을 가르는 큰 고개라서 한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복숭아, 감, 자두 등 과수를 생산하는 농가였다가 1980년대 낙향한 한 남자 덕분에 한재미나리는 ‘금나리’로 신분이 격상된다.

대구에서 시내버스를 몰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이승밀씨. 그는 대구 누님이 미나리 농사로 괜찮은 수익을 올리는 것을 보고 새 출발을 다짐한다. 큰 맘 먹고 고향에서 미나리 사업을 시작한다. 1965년 무렵부터 한재골에서는 미나리를 푸성귀거리로 재배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생산물의 일부를 청도시장에 출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시설재배 미나리는 전무했다. 당시 농민들은 거의 농협에 빚지고 있었다. 다들 막막한 심사를 화투와 술로 달래던 시절. 이씨는 그렇게 막막한 논에 미나리를 심었다. 농사보다 3배 이상 짭짤한 수익을 내자 그제서야 하나둘 미나리판에 뛰어든다. 미나리 열풍은 요원의 불길처럼 평양리-음지리-상리로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청도와 밀양을 잇는 25번 국도에서 902번 지방도로 들어서면 한재 미나리 마을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계곡의 물은 밀양강으로 합쳐져 낙동강에 이른다. 계곡이지만 양옆의 산이 산그림자를 덮지 않으며, 남동으로 향하여 볕이 나는 시간이 길다.

1996년쯤 한재가 미나리 단지로 반듯하게 자리를 잡는다. 2000년부터는 대구, 포항, 부산, 울산, 밀양 등지 나들이객이 한재로 먹거리 관광까지 온다. 마땅한 주차 공간이 없다보니 승용차 교행 과정에 숱한 시비가 벌어졌다. 다들 미나리 때문에 그 불편을 꾹 참는다. 작목반에서 원칙을 정한다. 미나리만 생산하는 작목반, 그들로부터 미나리를 받아 삼겹살을 파는 식당으로 역할분담이 된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미나리밭에서 ‘삼겹살파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과정에 봄날 미식가의 혀를 사로잡는 ‘미나리삼겹살’이 태어나 전국으로 확산된다.

한재 미나리는 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진한 자줏빛 줄기가 유달리 발달돼 있다. 밑동을 잘라보면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있지 않고 꽉 차 있다. 1년에 딱 한번만 벤다. 1월말~2월초 초매가 시작돼 4월초면 파장이다. 한재미나리는 밑동이 자주색을 띠고 뿌리에 구멍이 없이 꽉 찬 게 특징이다. 현재 한재미나리와 관련 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 한재미나리생산자연합회 등 모두 8개 모임체가 있다. 재배농가는 130여개, 면적은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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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쯤 자리잡은 한재 미나리 단지
1월말∼2월초 초매 시작, 4월초 파장
작목반 미나리와 삼겹살 음식점 윈윈
먹거리 관광…미나리삼겹살 전국 확산

토종 돌미나리 포스 닮은 정대미나리
헐티재 가는 포장도로 덕 인지도 쌓아

각 시·군간 한재미나리 재배기술 공유
본리리·명곡리 나뉜 화원미나리작목반
미나리 탁주시대 여는 ‘사문진 탁배기’
농번기 초봄 어르신 일손만으로 태부족


◆정대미나리

한재가 ‘좌청룡’이라면 달성군 가창면의 명물인 정대미나리는 ‘우백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재보다 더 골이 깊고 햇볕보다 그늘이 더 풍성한 게 특징이다. 정대미나리는 그래서 토종 돌미나리의 포스를 닮고 있다.

‘청록 정대미나리작목반’의 뒤안길을 ‘벚꽃집 아저씨’로 불리는 김정복씨(72)가 잘 안다. 그가 들어왔을 때 정대리에는 식당도 거의 없었다. 수제비와 멧돼지바비큐를 잘했던 큰바위집, 정대숲 안에서 칼국수 두부 닭백숙 등을 팔았던 가게 두 곳이 전부였다. 지금은 명물이 된 미나리조차 없었다.

현재 정대마을회관 근처에 자기 논이 있었던 추병수씨(2002년 83세로 작고). ‘추 노인’으로 불렸던 그가 오늘의 정대미나리 농사의 터전을 닦는다. 어느 날 대구 서북쪽 변두리 미나리밭에서 미나리를 키우던 한 사내가 추 노인을 찾아와 논을 임차해 달라고 부탁한다. 조건도 괜찮고 해서 추 노인은 그 사내에게 논을 넘긴다. 하지만 빚만 지고 사내는 정대를 떠난다. 사내가 떠나자 빈 논을 보고 있던 추 노인은 쌀농사보다 미나리 농사가 훨씬 경제성이 있을 것 같았다. 정대미나리가 인지도를 갖게 된 것은 헐티재로 가는 길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판로가 괜찮았다.

18년 전부터 정대미나리작목반이 만들어진다. 13년 전부터 농장별 간이 판매대가 설치된다. 최우석, 최판용, 김정복, 이말돌, 이영환, 이영만, 우진기, 김재현, 이영태씨 등이 그 판매대에 매달린다. 한재는 이른 봄에 한 번 반짝 특수를 누린다. 반면 정대는 2~4월 초는 하우스용, 4월 초~5월 말은 더 부드러운 노지 미나리를 판매한다. 다른 곳은 미나리삼겹살 때문에 북적거리는데 여기는 아직까지 미나리에만 집중하는 게 특징.

◆화원미나리를 찾아서

한재미나리 종묘는 그뒤 영천 정각리 별빛마을, 팔공산, 달성군 정대와 화원읍, 경산 용성면, 경주 산내면, 강원도 홍성 등지로 팔려간다.

각 시·군 농업기술센터 간에 한재미나리 재배기술을 공유한다. 화원미나리의 역사는 13년 정도. 한재미나리에 비하면 한참 후배다. 그런데 한재로 몰리던 미나리족이 이맘때면 대거 화원읍 쪽으로 몰린다. 화원미나리작목반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본리리 작목반과 명곡리 작목반이다. 이 밖에 화원읍 설화리, 옥포읍 등지에서도 후발 미나리 하우스촌이 세를 형성 중이다.

지난주 무려 26명의 회원이 진을 치고 있는 본리리(일명 인흥마을) 미나리촌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비닐하우스에선 고기를 팔지 않는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나리하우스는 거의 그린벨트구역이라 식당업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로 오는 사람들은 미나리를 사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다. 불판에 두툼한 삼겹살을 올리고 그 위에 미나리를 올린다. 적당한 기름의 향훈과 미나리 채향이 서로 한 몸이 되도록 기다린다. 주당들은 대다수 소주를 곁들이지만 최근 미나리탁주시대를 열기 위해 근처 커피숍 주인 임종씨가 만든 ‘사문진 탁배기’가 단골층을 만들고 있다.

미나리에 감긴 삼겹살 한 점. 웬만한 시름은 눈 녹듯 사라진다. 식당과 비닐하우스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미나리삼겹살. 하지만 이미 지역민의 식문화로 정착했기 때문에 관련 식당주와 미나리 주인, 행정이 서로 살 수 있는 그림을 그려봐야 될 시점이다.

미나리촌은 남평문씨 세거지에서 화원휴양림 언저리에 앉은 마비정마을까지 드문드문 도로변에 자릴 잡고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미나리를 재배한 농민은 누굴까. 경남 창녕군 출신인 김선칠씨(68)가 아내(김명옥)와 함께 13년 전 미나리농사를 시작한다. 노부부는 1982년쯤 고향을 떠나 본리리로 이사를 와 터전을 닦아나간다. 처음에는 미나리가 아니라 원예농원을 꾸려나갔다. 화훼, 양란, 관엽식물 등을 키웠다. 그 무렵 이 마을은 미나리가 아니라 토마토와 부추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김씨는 한재미나리 종묘를 갖고 화원미나리를 키워냈다. 나중에는 달성농업기술센터에서도 미나리특화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에 올라탄 사람들이 현재 미나리 주인들이다. 이들이 미나리로 괜찮은 수입을 올리자 옆 마을 명곡리에서도 기술이전을 요청했다. 김선칠씨는 명곡 작목반 김관명씨한테 미나리를 전해준다. 명곡 작목반은 본리 작목반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았지만 미나리삼겹살로 치고나갔다. 수익이 더 좋다 싶어 본리 작목반도 삼겹살을 받아들인다. 현재 16명의 회원이 있다.

김관명씨는 현재 ‘맥반석미나리’란 상호를 갖고 영업하고 있다. 맥반석 가루를 밭에 뿌려 미나리를 키우는 게 이 집만의 강점이다. 올해는 1월23일에 첫 미나리를 팔았다. 얼추 4월10일이면 올해 농사를 접어야 한다. 주말엔 하루 200단, 평일은 100단 정도 거래가 된다.

본리 작목반의 막내는 문을 연 지 1년 밖에 안되는 22호 ‘산울림미나리’. 현풍 출신인 주인 신정하씨는 36년 전 이 마을로 시집왔다. 10년전부터 노루궁뎅이버섯을 특화출하했다. 여러 버섯을 중탕숙성한 진액 판매에 집중했다. 그런데 손님은 버섯에 관심이 없고 모두 ‘미나리타령’만 외쳐댔다. 버섯을 돋보이게 하려고 후발주자로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올해 첫 미나리를 1월24일쯤 출하했다. 하우스 두 동(한 동 평균 990㎡)을 갖고 있다. 농사를 시작할 때 미나리 종묘도 200만원어치 구입했다. 용수 확보도 어렵다. 미나리는 상수도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개당 800만~1천200만원 들여 지하수를 판다.

이들 미나리작목반 사람들에겐 초봄이 농번기. 갓 캐내온 미나리를 잘 다듬으려고 하면 동네 어르신만의 일손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철만 되면 일손을 구해야 한다. 이들의 일당도 작목반에서 협의해 정한다. 현재 일당은 6만5천원. 미나리 1㎏ 한 단은 1만1천원. 지난해보다 1천원 올랐다.

이 미나리촌은 보통 매년 40~50일 미나리식객으로 북적댄다. 이후는 다음해 농사를 준비해야 된다. 종묘용 미나리 양육은 보통 9월5일부터 열흘 정도 이어진다. 한숨 돌릴 틈이 별로 없다.

그래, 미나리삼겹살은 ‘푹신’하지만 일손은 늘 ‘팍팍’하기만 하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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