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죽은 정의의 사회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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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30   |  발행일 2019-09-30 제31면   |  수정 2020-09-08
[월요칼럼] 죽은 정의의 사회
원도혁 논설위원

얼마전 집에서 TV로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데스 위시(Death Wish)’는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다. 민머리 액션 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했고 지난해 10월 미국서 개봉됐다. 브루스 윌리스가 열연한 주인공은 폴 커시라는 외과의사다. 낮에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느라 수술과 치료에 열심이지만 밤에는 180도 달라진다. 후드티를 입고 총으로 중무장한 뒤 거리로 나서 악한들을 쏘아 죽인다. 자신의 집을 털면서 아내를 죽이고 사랑스러운 딸마저 혼수상태로 내몬 악당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다. 그가 병원에서 의식없이 누워있는 딸을 보면서 내뱉은 혼잣말은 이후 그의 변신을 예고한다. “내 딸은 이렇게 갇혀서 의식도 없이 지내는데 이렇게 만든 놈들은 밖에서 자유롭게 활개를 치고 있다니…”. 이 장면 이후 의사 폴 커시는 ‘법이 응징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한다’며 ‘정의의 사자(?)’로 돌변했다. 밤의 무법자들을 잇따라 처단하던 과정에서 자기 집을 털고 아내와 딸에게 해코지를 한 일당까지 알아낸다. 당연히 원수들은 폴의 죽음을 불사한 복수에 하나 둘 차례로 처단된다. 딸은 마침내 깨어나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지막 남은 악한과 그 일당들이 집을 습격하는데, 이를 폴 혼자서 막아내는 장면은 클라이맥스다.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청량 음료같은 전개로 호평을 받았다. 관람객 평점 7.45, 네티즌 평점 8.32가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무자비한 그의 응징 총질에 대한 논란과 의문이 영화속에서도 계속 제기된다. 과연 사회적 정의인가 아니면 개인의 시원한 복수에 불과한 범법인가. 범죄 현장만 보면 이유도 묻지않고 무조건 왼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대는 닥터 폴 커시의 잔인한 행위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통쾌하긴 하지만 뭔가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다. 앙갚음 후 후드티를 벗어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고 현장을 재빨리 빠져나오는 용의주도하고 영리한 주인공의 모습에 관객은 안도하면서도 전율한다.

이 대목에서 ‘받은 그대로 되갚아 준다’는 동해보복(同害報復) 원칙을 뜻하는 라틴어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가 대입된다. 함무라비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규정과 일목 상통한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6대 군주 함무라비왕이 만든 가장 오래된 이 성문법에 동해보복 관련 규정이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받은 만큼 되갚아 주는 게 악을 제어하는 당시의 정의 구현 방식이었던 것이다. 수주 변영로는 시 ‘논개’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든 의기 논개가 표출한 분노를 ‘종교보다도 깊은 거룩한 분노’라고 표현했다. 이런 정의 구현이나 거룩한 분노는 이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화제를 모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제목이 ‘죽은 정의의 사회’라는 문구와 교체돼 떠오른다. ‘우리 사회와 대한민국에 정의가 죽었다’는 한탄이 나오는 작금의 시대상황 탓이다. 공정·올바름·의로움이 짓밟히고 뭉개지는 사태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어 국민은 절망하고 있다. 염치와 분수를 모르는 파렴치한들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저지레를 하고 있어도 막을 방도가 없어 보이니 더욱 그렇다.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어쩔 것인가. 옳고 의로운 일을 하는 게 정의다. 부정·편법·반칙은 반대 개념이다. 타인과 사회에 해를 입히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고위 공직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나라가 싫어 이민가고 싶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작가 마이클 샌델은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롯한 위대한 사상가들의 정의에 대한 견해를 전하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달라질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옳고 의로운 일에 대한 개념은 간단하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샐린저는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뛰어놀 때 언덕 벼랑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사회에 해악을, 주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파렴치한은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그토록 천착해온 이념 정의·공정은 정녕 죽어버렸는가.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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