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견훤에 패한 공산전투…왕건 퇴로길서 붙여진 팔공산 일대 마을이름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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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9   |  발행일 2019-11-29 제34면   |  수정 2019-11-29
■ 왕건길
공산전투의 왕건 길과 관련된 지역 명칭과의 연관성을 논문으로 발표한 류영철 문학박사가 대구시내 한 커피숍에서 논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 아우르는 역사·문화지도 아쉬움…관광자료 충분한 가치”
‘왕건 유적길 지도’ 제작
권순신 시선과 프레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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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구 지묘동 왕산 아래 위치한 신숭겸 장군 유적지 전경. <대구 동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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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구 지묘동 파군재 삼거리에는 공산전투에서 갑옷을 바꿔 입고 자신은 전사하고 왕건을 구한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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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전투로 화살이 가득했다는 북구 무태인근 ‘살내’. <류영철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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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자리에 후손인 신흠과 외손인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1607년에 쌓은 표충단(왼쪽)과 순절지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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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의 왕건 길과 관련된 지역 명칭과의 연관성을 논문으로 발표한 류영철 문학박사가 대구시내 한 커피숍에서 논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 동구와 북구, 남구의 여러 지명들이 후삼국시대 고려와 후백제 간 공산전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지명과 관련해선 어느 정도 정설(正說)이 있지만, 왕건의 전투 및 퇴각 경로에 대해선 다양한 설이 있는 상황이다. 위클리포유는 공산전투의 왕건 길과 관련된 지역 명칭과의 연관성을 논문으로 발표한 류영철 문학박사의 ‘공산전투의 재검토’ 논문을 토대로 왕건 길을 재구성해 봤다.

후삼국시대, 대구서 경상도 주도권 싸움
고려·후백제 경상도 진출권 경쟁 치열
인질문제로 양국간 군사적 대결 재개
후백제 적극 반격…신라의 경주 함락
왕건·5천명 구원병, 공산서 견훤과 만남



우선, 공산전투가 일어나게된 배경이 궁금하다. 하필이면 대구의 팔공산지역에서 고려와 후백제 간의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920년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하면서 고려와 후백제는 경상도지역에서 그들의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다. 922년부터 본격화된 고려의 경상도지역 진출 확대는 후백제에 위협적 요소로 작용했고, 후백제의 견훤은 이의 견제를 위해 924년과 925년 두 차례에 걸쳐 조물성(안동과 상주 사이로 추정)을 공격한다. 두번째 조물성 전투에서는 왕건과 견훤이 직접 조우했으며, 전세가 불리해진 고려가 화의를 요청해 왕건이 견훤을 ‘상부(尙父)’라 칭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926년 4월 후백제에서 고려에 인질로 파견한 진호가 고려에서 사망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다시 경색된다. 후백제가 고려 측에서 보낸 인질인 왕신을 투옥하고 웅진(충남 공주)으로 진군함으로써 양국 간 군사적 대결이 재개된다.

후백제의 웅진 진출 이후 고려의 대(對)후백제 정책도 적극적 공세로 전환된다. 927년 1월 용주(예천 용궁) 공격 이후 4월 강주(경남 진주) 공격을 기반으로 3개월 후인 7월 후백제의 경상도 진출을 위한 세력거점인 합천지역을 격파하는 등 적극적 반격을 시도한다.

후백제의 국운을 건 마지막 전투인 936년 9월 일리천(구미)전투는 경상도지역의 확보와 신라의 복속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 시기 경상도지역에서 후백제 세력의 급속한 약화는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대규모의 군사행동이 곧 신라 왕실이 있는 경주 침공으로 나타났으며, 뒤이어 공산전투로 진행된다.

927년 9월 후백제는 근품성(문경)을 공격해 불사른 이후 곧이어 고울부(영천)와 경주를 함락한다. 고려는 이러한 후백제의 군사적 행동과 신라의 구원요청에 따라 1만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등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을 했으나, 이 병력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경주는 함락된다.

신라의 수도가 후백제에 의해 유린되고 왕마저 살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경상도지역에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해가고 있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에 왕건이 직접 5천명의 정예병력을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게 된다.

왕건이 온 행적은 대체로 충북 충주에서 계립령(수안보 미륵리~문경읍 관음리 사이)을 넘어 문경 방면으로 온 것으로 파악된다. 문경에서 공산(팔공산)까지 이르는 과정은 자세하지 않다.

대구의 공산지역까지 온 왕건의 고려군은 영천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견훤의 후백제 군사와 만나게 된다.

이처럼 왕건의 구원병이 경주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팔공산권역에서 멈추게 된 것은 후백제군이 곧 대응해 병력을 이끌고 온 탓도 있지만, 이 시기 대구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군 공산전투서 대패
왕건·고려군의 진행로서 유래된 地名
병사에게 태만하지 말라 지시 ‘무태’
선비 글 읽는 낭랑한 소리 들려 ‘연경’
대치한 兩軍의 화살로 강 이룬 ‘살내’

팔공산지역에서 벌어졌던 고려군과 후백제군 사이의 전투에 대해서는 역사자료에 구체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팔공산 일원을 중심으로 한 대구의 각 지역에는 공산전투와 관련해 비롯된 지명이나 설화 또는 속전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군의 진행로는 대체로 팔공산의 서쪽 방면에서 동쪽 방면으로 진행된다. 현재의 북구 동변동·서변동(행정동은 무태조야동) 지역에는 ‘무태(無怠)’라는 지명이 전해져오고 있는데, 그 지명의 유래는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왕건이 이 지역을 지날 때 이 지역 주민들의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해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무태지역에서 동화천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행하다 보면 연경동을 지나게 된다. ‘연경(硏經)’이라는 지명 또한 왕건이 이 지역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와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고려군은 연경에서 계속 동화천을 따라 동쪽으로 진행해 지묘동과 미대동을 거쳐간다. 백안동 또는 내학동 부근에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서 언급한 동수(동화사 병력)를 제압한다.

동화사 아래를 통과한 왕건의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능성고개를 넘어 계속 영천방면으로 진행하다가 태조지(은해사 인근으로 추정)에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만난다. 공산전투의 전초전이었던 태조지전투에서 왕건은 패한다. 후퇴하는 고려군의 퇴로는 영천까지 진출했던 길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화천변을 낀 퇴로길을 따라 진행하다 보면 지묘동의 나팔고개가 나온다. 나팔고개의 지명유래와 관련해서는 ‘고려군이 이 고개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후백제군을 향해 나팔을 불면서 진군했다는 설’과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에워싸고 진격하면서 나팔을 불었다는 설’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격파하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는 설’ 등 나팔을 분 주체가 서로 다른 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양국 간의 전투 진행상황을 추론해 볼 때 나팔고개의 명칭은 바로 고려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이며,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나팔을 불었던 주체를 후백제로 상정한 설들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고려군이 후백제군과의 첫 접전에서 패배한 후 후퇴해 군사를 재정비한 곳은 현재 동화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살내(전탄·箭灘)로, 이 하천을 경계로 양 군이 대치하게 된다. 이 살내라는 명칭도 양군이 하천의 양쪽에 대치해 싸울 때 서로 쏜 화살이 강을 이루었다는데서 유래하고 있다. 살내를 중심으로 양 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고려의 장군인 신숭겸과 김락이 이끄는 원병이 합세한다.

이에 일시에 원기를 회복해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밀어붙이면서 진출한 곳이 미리사 앞이다. 현재 미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은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올라가는 길과 파계사로 올라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지묘동의 왕산(王山) 아래 산기슭이다.

이 곳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의 순절단과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긴 비각과 표충단이 있다. 그 뒷산이 왕산이다.

미리사 앞 전투가 공산전투 중 가장 치열했다. 미리사가 위치해 있었던 왕산 아래서 전개된 전투는 현재 동화사와 파계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시작되는 파군재에서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난다.

글·사진=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 류영철 문학박사 프로필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 △전 영남대 국사학과 강의교수 △전 대구시사 집필위원 △전 경상도 700년사 집필위원 △전 달성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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