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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장군의 유적을 기리기 위해 평산신씨 문중에서 대구 동구 평광동 실왕리에 세운 ‘모영재(慕影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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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순조 32) 평산신씨 후손인 신정위가 신숭겸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대구 동구 평광동에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있는 영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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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에서 패한 뒤 겨우 몸을 돌보게 된 왕건이 동쪽으로 향하다가 대구 동구 봉무동 토성의 산기슭에 앉아서 쉬었다고 전해지는 ‘독좌암’. <류영철 박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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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에서 패한 뒤 겨우 몸을 돌보게 된 왕건이 동쪽으로 향하다가 대구 동구 봉무동 토성의 산기슭에 앉아서 쉬었다고 전해지는 ‘독좌암’. <류영철 박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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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패한 뒤 도주하면서 편안히 쉬어 간 곳이라는데서 유래된 대구 앞산에 위치한 ‘안일사’ 전경. <류영철 박사 제공> |
대구 곳곳에 신숭겸 유적지
도주중 토성 산기슭에서 쉰 ‘독좌암’
노인 등 피란가고 아이만 남은‘불로’
허기 달래고 간 왕을 잃은 곳 ‘실왕리’
왕건이 신숭겸 명복 위해 세운 사찰
참패로 병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숭겸이 후백제군의 눈에 잘 드러나는 왕건의 갑옷을 자신의 갑옷과 바꿔입고 후백제군을 자신에게로 유인함으로써 왕건을 구한다. 현재 이 지역의 명칭이 ‘지묘동’으로 전해지게 된 것도 왕건을 구한 그 지혜가 교묘하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지묘동 파군재삼거리에는 신숭겸 장군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있다.
겨우 몸을 돌보게 된 왕건의 도주로는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동쪽으로 향한다. 현재 지묘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봉무동에는 토성의 산기슭에 왕건이 도주하다가 앉아서 쉬었다는 속전이 전해지는 ‘독좌암’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으며, 그 남쪽인 불로동에서 불로천을 따라 도동과 평광동 쪽으로 진행되는 곳에는 아직도 왕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불로동은 왕건이 지나갈 때 노인과 부녀자는 모두 피란을 가고 어린아이만 남아 있었다고 해 훗날 이 마을을 불로(不老)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공항 서쪽에 위치한 도동은 원래 장산군의 영현인 해안현의 읍치가 위치해 있었던 곳인데, 속전에 의하면 왕건이 해안교 다리가 있는 부근의 들판을 지날 때 후백제군이 나타날까 걱정했으나 무사하게 되자, 마음이 놓여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고 해 이 곳을 해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치성화현이었던 이곳을 해안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신라 경덕왕때라고 밝히고 있어, 이곳의 지명과 관련한 속전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왕건과의 관련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도동을 거쳐 역시 불로천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평광동에 이른다. 평광동의 동쪽 끝은 불로천이 발원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산에 의해 길이 가로막히게 된다. 산 아래 마을은 속칭 ‘시량이’라고 불리는데, 원래 ‘실왕리’였던 마을이름이 점차 음(音)이 변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실왕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 속전에서는 왕건이 도주 중 평광동의 뒷산으로 숨었는데, 이곳에서 쉬면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랬으며, 후에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왕을 잃은 곳’이라 해 이곳을 ‘실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모영재와 신숭겸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라는 내용이 담긴 비각이 보존돼 있다. 비문의 뒷면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이곳은 왕건이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던 미리사와 지묘사, 대비사 중 신숭겸의 영정을 모신 대비사가 있었던 곳이다. 신숭겸과 직접적 관련성을 찾아 볼 수 없는 이곳에 관련 유적이 있다는 것은 왕건과 관련된 속전에 신빙성을 보태고 있다.
불로천변을 따라 평광동의 시량이까지 이르렀던 왕건은 길이 막히자, 산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산을 넘어 이를 수 있는 곳은 동쪽으로 환성산을 넘어 현재의 경산 하양읍으로 가는 길과 동남쪽으로 산을 넘어 현재의 안심지역인 매여동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속전에 전하는 왕건의 관련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매여동 방면의 길을 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취재차 찾은 실왕리는 대구에서도 가장 골짜기였다. 차량으로 몇 번을 돌아서 겨우 찾을 정도였다. 이 곳은 이제서야 상수도 공사를 할 정도로 오지 중 오지였고, 더 이상 나갈 수 없이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하나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이 마을 아래를 흐르는 하천 명칭이 시량천이 아닌 ‘시랑천’으로 간판에 표시돼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발음에 따른 착각인듯 하다.
남구 앞산자락 사찰 명칭도 왕건과 연관
앞산자락 은신한 절 ‘은적사·안일사’
왕건이 쉬어 간데서 연유한 ‘임휴사’
성서∼낙동강변∼성주방면 이동 추정
패했지만 민심 잃지 않아 고려에 큰 힘
대구 동구 안심지역은 속칭 ‘반야월’이라 불리며, 그 이름의 유래가 왕건이 이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 도주로를 비춰주었다고 한데서 연유한다. ‘안심(安心)’이라는 이름 또한 왕건이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안심하게 되었다고 전하는 속전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왕건의 행적이 전해지는 대구의 남쪽 방면에 있는 앞산지역까지는 그 도주로의 연결선이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금호강을 건너 지금의 경산 압량지역이나 현재 대구 수성구 고모동 방면을 지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지나 앞산(대덕산)에 이르면 왕건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속전들이 사찰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왕건의 도주로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로 천변을 이용하거나 적대 세력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산기슭의 외곽을 이용했는데, 대구 남구 앞산에 이르러서도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앞산지역에 있어서 왕건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곳으로 우선 ‘은적사’를 들 수 있다.
앞산의 아랫봉인 비파산의 동쪽자락에 위치한 은적사의 창건유래는 ‘은적(隱寂)’이라는 용어에서도 느껴지듯이 왕건이 이곳에 은신하여 머물렀던 곳이라 해 고려 태조 18년(936)에 영조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서쪽방면으로 진행하면 역시 비파산의 서북쪽자락에 ‘안일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안일사(安逸寺)의 창건 또한 왕건이 이곳에서 편안히 쉬어 간 곳이라는데서 유래하고 있어 왕건의 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또한 앞산의 아랫자락에는 속칭 ‘안지랑골’이 있는데, 왕건이 이곳에 이르러 물을 마셨다는 왕정(王井)이 남아 있으며, 이 물을 ‘장군수’라고 부르고 있다.
은적사~안일사~안지랑골로 이어지는 앞산순환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앞산의 서쪽자락으로 현재의 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임휴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사찰의 창건유래 또한 왕건이 이곳에 임(臨)하여 쉬어 간데서 연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류 교수는 “논문이 비록 사료적 뒷받침이 없는 속전의 내용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렇게 왕건의 도주로를 상정해 볼 때 왕건은 대체로 팔공산자락에서 동화천변을 따라 해안현지역을 거쳤으며, 현재의 안심지역을 경유한 후 대구의 앞산지역에 이르러서는 서쪽방면으로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후 왕건이 무사히 개경(현재 북한 개성)까지 돌아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왕건의 진행방향으로 볼 때, 대체로 성서지역을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 성주지역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군이 공산전투에서 대패했지만 왕건이 도주하는 과정에서 경상도지역에서 민심을 잃지 않았다는 점은 고려에 큰 힘이 됐다. 이에 고려군은 2년 뒤 후백제와의 고창(안동)전투에서 대승하며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공산전투는 고려에 가장 중요한 전투였던 셈이다.
글·사진=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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