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우리글] 김동리 기념관과 예기소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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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22   |  발행일 2020-01-23 제30면   |  수정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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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경북대 교수
경주에 다녀왔다. 경주를 들를 때면 으레 가는 장소가 있다. 바로 동리목월기념관, 예기소이다. 지난 가을 답사팀을 이끌고 경주에 갔을 때도 그곳들을 들렀다. 기념관은 불국사 일주문 건너편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답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여러 차례 경주를 구경했고, 심지어 불국사에도 들른 적이 있지만, 기념관을 둘러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곳에 그런 문학관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석장동에 있는 예기소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동리목월기념관과 적지 않은 인연을 갖고 있다. 2000년 가을부터 동리목월기념관 건립을 위한 논의가 있었다. 그해 12월 장윤익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나는 당시 총무(?)로 기념관 건립 발기인 대회 개최를 위해 2000여 통의 편지를 경주 시민을 비롯하여 지역 유지, 문인 그리고 문화계, 학계 인사들에게 보냈다. 2002년에는 김동리가 만년을 보낸 청담동 자택을 방문하여 김동리의 유품과 자료들을 조사하기도 했다. 동리목월기념관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건립되었으며, 유가족들의 관심과 협조로 많은 자료를 구비하였다.

동리목월기념관에 들르는 것은 동리 문학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내가 김동리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단편문학전집에서이다. 그 전집 제6권에 동리의 대표작 '무녀도'가 실려 있었다. 중학 시절 처음 그 작품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무당 모화는 기독교도 욱이가 사귀에 들렸다고 간주하고 "신주상 위의 냉수 그릇을 들어 물을 머금더니 욱이의 낮과 온몸에 확 뿜으며 '엇쇠 귀신아 물러서라 여기는 영주 비루봉 상상봉헤 깎아지른 돌벼랑헤, 쉰 길 청수헤 너희 올 곳 아니니라 바른손헤 칼을 들어 왼손헤 불을 들고 엇쇠 잡귀신아 썩 물러가라 툇툇!'"하며 의식을 행한다. 칼을 휘번뜩이며 잡귀를 물리치는 무당의 모습을 보아왔지만, 그곳에 언급된 '영주 비로봉'은 내가 늘 보아온 산이기에 더욱 신기하고 반갑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20년 전, 곧 2000년 새해 벽두에 나는 '쉰 길 청수'를 찾아 예기청수(예기소)에 갔다. 경주에서 서천과 북천(알천)이 합수하는 곳에 예기소가 있다. 모화가 사귀를 쫓는 의식 과정에서 휘두른 칼에 욱이는 상처를 입고 덧나 결국 죽게 된다. 그러자 모화는 읍내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 굿을 예기소에서 벌인다. 자신의 영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작가는 초혼굿을 벌이던 모화가 물속에 빠져 죽지 않고, '아주 잠겨져 버렸다'고 했다. 쾌자자락과 함께 자연의 리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개울물이 만나 휘돌면서 흘러가는 모습이 굿판에서 벌어진 모화의 마지막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성주는 우리 성주, 칠성은 우리 칠성, 조왕은 우리 조왕,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주님께 비나이다……산신헤 명을 빌하, 삼신헤 수를 빌하, 칠성헤 복을 빌하, 용신헤 덕을 빌하, 조왕님전 요오를 타고, 터주님전 재주 타니, 하늘에는 별, 바다에는 진주, 삼신조왕 마다하고 아니 오지 못하리라.

이것은 무당 모화가 치성을 드리면서 읊조리는 대목이다. 그녀는 성주, 칠성, 조왕, 신주, 산신, 삼신, 용신, 조왕, 터주 등 모든 신들을 불러낸다. 이처럼 김동리는 무녀도에서 우리 전통 기복신앙 및 샤머니즘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이후 그는 무녀도를 개작하여 장편 '을화'를 냈다. 이 작품은 1982년 노벨상 본선에 올랐다. 김동리는 가장 전통적이면서 토속성을 띤 작품이 가장 한국적인 문학이 되고, 나아가 그것이 세계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리목월기념관과 예기소에 가면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작가 김동리를 만날 수 있다.

김주현(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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