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산악인 장주효...."팔공산 비로봉 방송탑·통신탑 이전 市·道 미루지 말고 대처해야"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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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14   |  발행일 2020-02-14 제41면   |  수정 2020-02-14
"대구 산악문화 발전위해 걸어온 60년, 등산운동 영광 재현하고 싶어"

장주효1-2
2·28대구민주운동의 주역으로 대구경북 지역 언론운동에 앞장서면서도 지역 산악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장주효씨. 그는 한국산악회 대구지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산악회 종신회원이다.

2·28 대구민주운동·언론운동 '주역'
지역 등산사와 관련, 세권의 책 발간
1931년 지역 첫 등산동호인 모임 탄생
고교때 '새날동지회'서 산과 첫 인연
당시 문화예술계 거물 등산단체 수장
정치적 연관, 한국산악계 화근의 불씨
한국산악회·대한산악연맹 갈등 구도
한국산악회 경북지부도 독자적 노선


여든을 눈앞에 둔 산악인 장주효 삶의 구심점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진다. 생계를 위해 대구은행에서 오래 몸을 담았지만, 그 내면의 동선은 지역 정신문화운동의 향배와 호흡을 같이했다. 2·28대구민주운동의 주역, 대구산악운동의 주역, 지역언론운동의 주역 등이다. 대구고 1회 출신인 그는 그 어떤 영역보다 한국산악회와 한국산악연맹의 틈 사이에서 피어오른 지역 학생산악운동에 깊이 간여했다. 그런 그가 2018~2019년 매우 뜻깊은 지역 등산사와 관련된 3권의 굵직한 책을 펴냈다. '산과 산행 그리고 사람들' '자유민주 그리고 삶의 작은 몸부름' 그리고 '대구경북 등산운동과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약사'이다. 두 번째 책은 자서전의 범주에 든다.

그는 요즘 지역 등산 문화가 예전과 달리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생활레포츠의 한 자락인 걷기 운동 붐이 등산 문화를 압도하는 현실을 무척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가 책을 펴낸 것도 과거 빛을 발했던 지역 등산 운동의 영광을 재현해보고 싶은 소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를 만나 국내 산악단체의 현주소와 대구 등산운동사의 족적에 대해 들어봤다.

장주효-5등산일지
장주효씨가 1984년 5월5일 작성한 팔공산 산행일지.
장주효6
장주효씨가 2018~2019년 연이어 펴낸 책. 2·28대구민주운동 등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지역 등산운동사를 축약시켜놓은 저작물이다.

▶산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는가.

"1959년 여름, 그러니까 내가 대구고 2학년 때였다. 동기 김종욱(작고)이 우리 학교에 산악부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짧은 등산바지에 군용파카를 입고 이 반 저 반을 휩쓸고 다녔다. 부러워 보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때이고 등산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귀족놀음이란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2학년 말 내가 간여했던 '새날동지회'란 대안학생운동체의 겨울 팔공산수련회가 시작됐을 때 거기에 동행했다. 당시는 제대로 된 등산복이 없었다. 그냥 군복의 연장이었다. 등산화 대신 워커화를 신으면 잘 신은 것이었다."

▶첫 산행이라 고생을 많이 했겠다.

"동화사에서 백안삼거리까지 걸어갔다. 우리를 픽업해 줄 차가 나타나지 않은 탓이다. 새날동지회 회원들은 팔공산에서 군용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폭설이 내려 동화사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겨울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공산댐 옆으로 난 동화천 산길을 걸어서 불로동까지 와 버스를 타고 귀가한 게 나의 첫 등산 경험이다."

▶한국 등산 문화의 태동기가 궁금하다.

"산만을 목적으로 삼은, 근대적 등산관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산악회는 1931년에 창립된 '조선산악회'다. 조선산악회가 창립된 해에 대구에도 근대 알피니즘에 입각한 선구적 산악회가 탄생했다. 최계복, 최상화, 김동사, 박명조, 이병화 등 지방 단위로는 최초로 등산동호인 모임(경북산악회 또는 대구산악회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을 창립했다. 1945년 9월15일에 진단학회 다음으로 조선산악회는 단체등록 2호로 발족하게 된다."

▶지역 산악계 1세대의 행보가 궁금하다.

"창립산행으로 칠곡 가산바위를 종주했다. 중일전쟁으로 잠시 주춤했던 대구의 등산 운동은 1942년 여름 백두산탐구단에 경북대표로 최계복, 경남대표로 신업재가 참가하여 다시 열기를 띤다. 이들은 조선민보(대구일보의 전신)의 후원으로 1년에 두 차례씩 등산회원을 모집 산행하여 불모의 풍토에 등산운동의 씨를 뿌렸다."

▶대구산악회는 뒤에 전국적 등산 단체에 흡수됐다는데.

"대구산악회의 활약은 1946년 10월22일 한국산악회 경북지부가 발족되며 역사의 뒷면으로 몸을 숨긴다. 그 인맥의 주축이 모두 한국산악회 경북지부로 흡수된 까닭이다. 대구산악사에서 가장 큰 중심이 된 단체는 '한국산악회 경북지부'와 1957년에 결성된 '경북학생연맹', 1960년 대학산악부 졸업생을 묶은 '경북산악회'를 들 수 있다. 한국산악회 대구지부는 대구산악회가 뿌린 근대 등산정신의 씨앗을 단단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로 가꿨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경북학생연맹과 경북산악회는 60년대 한국산악계를 대구가 주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다졌다.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학생연맹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으로는 제3공화국의 거물 한솔 이효상을 회장에 앉히는 뛰어난 현실감각도 큰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문화계 거물들이 하나같이 등산 단체의 수장이 된 것 같다.

"바로 한솔을 비롯해 노산 이은상,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가 삼두마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솔은 정치권과 문화예술계를 통할할 수 있는 거물 중 거물이었다. 그는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산악모임을 정치적으로 끌고 갈 우려가 있었고 그게 훗날 한국 산악계 화근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의 갈등도 그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맞다. 대한산악연맹은 5·16혁명정부의 지시로 동일 목적을 가진 사회문화단체를 하나로 통폐합하면서 발족되었다. 한국산악회가 일제강점기부터 면연되는 기득권 주체인데 후발주자인 대한산악연맹에 고분고분할 리가 없었다. 군부정권 치하라서 뭐라고 할 수 없어 그냥 침묵할 따름이었다. 경북산악회가 1962년 12월에 대한산악연맹에 가맹함으로써 경북도연맹도 발족한다. 그런데 대한산악연맹이 결성되던 날, 회의 도중 한국산악회의 홍종인, 김정태, 윤현필, 이희성 등이 퇴장해버린다. 일종의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 1962년 이후 두 집 살림을 살게 된 한국산악계의 운명을 상징한 사건이다. 대한산악연맹이라는 연맹체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한국산악회 방침에 따라 한국산악회 경북지부도 1962년 이후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새날동지회
산악인 장주효씨가 대구고 2학년 때인 1959년 새날동지회와 함께 팔공산 등정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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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효씨(왼쪽)가 고교시절 제주도 정방폭포 앞에서 대구고 동기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런데 팔공산이 너무 난개발이 된 것 같다.

"1972년 10월 오랫동안 논의돼 오던 팔공산맥 종합조사의 일환으로 자연경관과 등산로 및 암벽코스를 두 차례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사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산악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팔공산은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2018년부터 대구시가 시민단체나 환경단체에서 환경 훼손과 사업 타당성에 대한 강력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팔공산케이블카 정상에서 동봉 방향 낙타봉까지 길이 320m, 폭 2m 구름다리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다. 고민 없이 혼이 없는 물량 개발에만 치중하다가는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후손에게 빌려 사용하고 있는 하나뿐인 이 팔공산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비로봉 내 방송탑. 통신탑 이전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광주 무등산의 경우, 장불재와 중봉에 송신철탑과 군부대가 우리처럼 수십 년 죽치고 있었는데, 지역사회에서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하여 20여 년 전에 군부대를 이전하고 정상에 있는 방공포대도 2015년에 이전협약을 했다. 무등산은 군부대가 이전한 장불재에 억새가 넘실대는 탐방로를 만들었다니 산에 다니는 사람으로 심술이 난다. 어떻게 우리는 그 넓은 품과 산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반에 미치지 못하는 산에게 소위 '국립공원'이라는 이름도 먼저 내어주었는지 알다가 모를 일이다. 때문에 이 지역이 대구 것이고 경북 것이라고 미루지 말고 해당 부처인 국방부를 찾아 대안을 제시하면서 성의 있는 문제해결의 자세를 갖도록 정말 강력히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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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영호남 산행대회 직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장주효씨(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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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효씨가 중국과 수교 전 백두산 천지를 답사했을 당시 찍은 사진.

▶잊을 수 없는 지역 등산인이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최억만과 최계락이다. 최억만은 경북스키연맹을 창립하는 등 지역이 배출한 클라이밍의 비조로 인정받고 있다. 걸출한 등반능력과 등로주의를 추구하는 시대를 앞선 안목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심한 방랑벽과 기행으로 낭인생활로 일관하다가 말년에는 비참하게 지냈다고 한다. 시대를 잘못 만난 불행한 '프로 산쟁이'였던 셈이다. 최계락은 우리 한국산악회 대구지부(발족 당시 조선산악회 경북지부) 초대 지부장이다. 대구사진관 사장이었고 산악가임과 동시에 사진작가이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일요일까지도 매월 월례 등산을 거르지 않고 실시했다. 그러나 그도 너무나 일찍 미국으로 이민 가버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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