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아카데미극장 가던 대명동 소년, 할리우드 정복하다

  • 박주희
  • |
  • 입력 2020-02-11 07:13  |  수정 2020-02-11 07:20  |  발행일 2020-02-11 제3면
봉준호 감독 '대구의 추억'
2020021101050004483.jpg
영화 '기생충' 출연진 및 제작진이 9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에서 태어나 12세 때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은 어리숙하고 소심한 소년이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대구의 아들' 봉준호 감독은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오스카 역사상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오스카 작품상 트로피를 들어 올린 거장으로 우뚝 섰다.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오스카 트로피를 한꺼번에 4개나 거머쥐며 '외국어 영화가 오스카를 정복하는' 새 시대를 열었다.

◆대구 남도초등 3학년까지 다녀

봉 감독은 1969년 대구 남구 봉덕동에서 태어났고, 대명동에 살다가 1978년 서울로 이사를 갔다. 한 지역 언론에서 봉 감독이 봉덕초등 3학년까지 다녔다고 보도한 적이 있지만, 봉덕초등이 아니라 남도초등 3학년까지 다니다 전학을 간 것으로 확인됐다. 서성희 오오극장 대표는 "대구에서 다닌 초등학교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이 많아서 봉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니 남도초등 3학년까지 다녔다고 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의 아버지는 고(故) 봉상균씨로, 봉 감독이 태어났을 때 효성여대(현재 대구가톨릭대) 생활미술학과 창설 멤버로 교수 생활을 했다. 당시 효성여대는 봉덕동에 있었다. 한국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선친은 이어 영남대 교수와 서울과학기술대 미대 교수를 거쳐 초대 서울비주얼아티스트비엔날레협의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봉 감독은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대명동집 서재·화실 놀이터 삼아
영화 잡지로 시각적 감수성 키워
봉 감독 "앞산·수성못 간 기억도"



또 외할아버지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등을 쓴, 한국 근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박태원씨다. 형 봉준수씨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며, 누나인 봉지희씨는 연성대학 패션스타일리스트과 교수다. 아내는 시나리오 작가 정선영씨다. 봉 감독은 "아내가 내 대본을 처음으로 읽는 독자다. 매번 대본을 끝내고 아내에게 보여줄 때마다 두렵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들인 효민씨(본명 봉효민)도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며, 2017년 YG케이플러스의 웹무비 '결혼식'을 연출했다. 집안 내력이 문화예술 DNA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봉준호가 살았던 대명동의 집 서재 겸 화실은 동네 아이들과 형제의 놀이터였다. 누나인 봉지희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클래식, 특히 성가곡을 좋아하셔서 집에선 항상 음악이 흘러나왔다. 외국에 다녀올 때마다 항상 디자인이 신기하고 예쁜 물건을 사다 줘 문화적 충격을 받곤 했다. 미국과 일본의 영화잡지도 많이 보셨는데, 준호는 어릴 적부터 그 책들을 끼고 살았다"고 말한 바 있다. 어린 봉준호는 아버지가 사 온 외국 잡지를 보면서 시각적 감수성을 키우고, 소설가였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봉 감독은 2017년 7월 영화 '옥자' 개봉차 대구를 찾아 만경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어릴 적 대구에서의 추억이 많다. 앞산 케이블카도 타고, 수성못에서 스케이트도 탔다. 어릴 때 만경관과 아카데미 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기억도 있다"고 대구에 대한 기억을 내비친 바 있다.

◆열두 살에 영화감독 되기로 결심

봉 감독은 열두 살의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영화광이었다.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군 제대 후 학내 동아리 '노란문'에서 활동했다. 이때 16㎜ 필름으로 '백색인'(1993)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든 것이 데뷔작이다.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11기로 들어가 '프레임 속의 기억들'과 '지리멸렬'로 1994년 밴쿠버와 홍콩영화제에 초청되며 기대주로 주목받았다.

아카데미를 마친 봉 감독은 1999년까지 충무로에서 조연출과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이력을 쌓았다. 그러다 우노필름(싸이더스의 전신) 차승재 대표의 눈에 띄어 31세의 나이로 첫 장편영화 연출의 기회를 얻게 된다.

첫 상업 장편영화는 '플란다스의 개'(2000). 배우 배두나의 첫 주연작이기도 했던 영화로, 대중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다수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외국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봉준호라는 이름 석자를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바로 '살인의 추억'(2003)이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재해석한 영화로 525만 관객을 불러모으며 그해 국내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이후 1천만영화 '괴물'(2006)을 내놨고, '도쿄!'(2008), '마더'(2009), '설국열차'(2013), '옥자'(2017) 등을 선보였다.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기자 이미지

박주희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연예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