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일상의 시선] 2020년 봄 산책 일기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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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3-27   |  발행일 2020-03-27 제22면   |  수정 2020-03-27
코로나로 사방이 고즈넉해
매화나무 아래서 홀로 커피
유일한 친구는 나무 지팡이
분홍꽃 만발한 진달래 숲서
봄날의 외로움 음미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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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일 월

가창 면소재지에서 신천을 따라 걸어 내려온다. 파동 쪽 강변에 매화가 피었다. 징검다리를 건너가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사선 강변 파동 도서관 앞뜰의 매화나무 아래 앉아 마신다. 봄 들어 최고의 사치를 누리고 있다는 행복한 기분. 그러나 코로나19로 문을 닫은 도서관 주변은 대낮인데도 사람이 없어 고즈넉하다. 나는 이내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 속에 버려진 듯하다. 문득 인기척에 돌아보니, 40대의 한 남자가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는 저만치서 얼른 마스크를 고쳐 쓴다. 나도 차 마시려고 턱 아래 내려놓은 마스크를 다시 올려 쓴다. 그게 요즘의 예의가 됐다. 힐끗 매화를 올려다보곤 그는 내게 목례를 하며 지나간다. 갑자기 서로 울컥해지는 느낌!

-3월12일 목

지팡이가 생광스럽다. 이상번 시인이 선친이 만든 거라며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걸 하나 챙긴 거다. 산책길의 유일한 친구다. 선우(善友)라 이름 지어주곤 각별히 친하게 지낸다. 어디를 가나 산책길엔 으레 그와 동행한다. 강변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문득 앞산 자락길로 올라서서 산길을 함께 걷기도 한다. 참으로 성품이 곧고 내게 충실한 친구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선우전(善友傳)'이란 소개 글도 써놓았다. 더러 강변 공중화장실에 들르기라도 하면, 선우가 문을 밀어 열고, 닫는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대신 층의 표시판을 눌러준다. 나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어지간한 일을 그에게 맡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접촉에 대한 공포의 시대에 그가 나 대신 위험한 데를 접촉하고도 태연한 것이 놀랍고 고맙지 아니한가?

-3월24일 화

우리 동네 가까운 용지봉 서편 골짜기를 걷다, 대구텍 동편 신천을 건너면 이내 골짜기로 든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꽤 출몰하는 곳이다. 이달 초 이 골짜기 초입에서 노루귀 핀 걸 보았고, 현호색도 찾아보는 것으로 봄맞이를 했지.

골짜기를 올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내 내가 '바위 아래 흐르는 길(岩下流路)'이라 이름 지은 산길로 접어든다. 산 중턱을 가로질러 파동까지 이어진, 잔도처럼 좁은 절벽길이다. 옛날에는 소도둑길이라 불렸단다. 가창 행정동의 소를 파동 쪽 도둑들이 훔쳐서 끌고 갔던 길이었단다. 지금도 인적이 드물다. 그런 만큼 산길의 깊은 맛을 간직하고 있다. 진달래가 숲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매년 지인들과 진달래 필 때쯤 이 산길에서 봄맞이 산책을 즐겼지. 올봄엔 이 길을 혼자 즐기려 한다.

사실은 이 길보다는 앞산 용두골에서 용두방천 쪽으로 흐르는 자락길(신천 위로 뜬 길이라고 해서 '강 위에 걸린 길(江上掛路)'이란 이름으로 나 혼자 부르기도 한다)이 내가 즐기는 산책길이었으나, 요즘 대구 시민들의 이용이 꽤 늘어나서 피하기로 한 것이다. 업체든 카페든 공연장이든 행사장이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위험 때문에 문을 닫아 거는 실정이니,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 신천이나 앞산의 산길을 걷는 경우가 늘어난다. '사회적 거리두기'인가? 그 번잡함 또한 피해야 한다는 경계심 때문일까? 아무튼 새로 이용하게 된 산책로의 큰 바위 아래서 잠시 쉬면서, 산 아래 오가는 차들을 내려다보며 올봄의 외로움을 새삼 음미하는 것이다.

시인·국립한국문학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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