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33] 대중문학에 부치는 편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을 읽고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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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09   |  발행일 2020-04-09 제20면   |  수정 2020-04-09
본격문학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판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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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개미'를 발표하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죽음'(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2019)을 읽고 착잡해졌다. 판매 순위 상위에 있는 재미있는 소설임에 틀림없고 나 또한 적지 않은 재미를 느끼며 읽었지만, 재미의 요소만 설명하며 소개하기에는 켕기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대중의 사랑을 받던 소설가 주인공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후 떠돌이 영혼으로서 자신의 살해범을 찾아 나서는 줄거리를 보인다. 사후의 영혼이 벌이는 추리가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것인데, 이 추리 과정은 주인공을 돕는 인물이 영계에서는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이고 현실에서는 절세 미모의 젊은 여성 영매로 설정되어 한층 재미있게 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특유의 소설적 장치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지속적으로 펼쳐지며 잡학의 즐거움을 주는 것도 흥미를 배가해 준다. 주인공의 살해범이 확인되는 과정이 단테의 '신곡'을 흉내 낸 설정이라는 점도 눈에 띄는 재미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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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주인공을 인기 소설가로 설정
과거 문인 모두 소환하다시피 해
본격문학 vs 장르문학 대전쟁


각기 제 몫 가지는 것이지
서로 배척하는 것일 수 없는데
이분법적 구분과 프랑스 문단 비판
시대착오적이며 문예학서 봐도 잘못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임에도 '죽음'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이 소설의 방식이 삶에 대한 성찰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나, 잡학의 즐거움을 주는 장치가 소설 서사의 연속성을 깨기도 한다는 점, 주요 인물들의 소개가 작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은 모두 부차적이다. 말석이나마 평단의 한 자리를 차지한 내게 가장 걸리는 이 소설의 껄끄러운 요소는, 프랑스 문단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나(1권 192쪽, 2권 97쪽) 현재 사회의 문학 상황에 대한 작가의 경직된 진단이다. 주인공을 인기 작가로 설정하면서 베르베르는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이분법을 명확히 하고, 장르문학을 옹호하며 본격문학을 비판하는 데로 나아간다. 결론은 대중들의 독서 진작을 위해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모두 노력하자는 말로 내려지지만(2권 260쪽), 거기에 이르는 데 과거의 문인들을 모두 소환하다시피 해서 본격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대전쟁을 벌이기까지 한다(2권 245~257쪽). 대표적인 평론가 장 무아지가 대단히 비윤리적인 인물이며 생전의 주인공을 대하는 데 있어 너무도 심한 비난을 일삼는 것으로 설정된 것 또한 같은 기능을 한다. 이로써 본격문학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판이 '죽음'의 한 가지 주제가 된다.

장르문학작가가 장르문학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자부심이 본격문학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유감스럽다. 현재의 문학 시장에서 본격문학에 비해 장르문학, 대중문학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장르문학에 대한 본격문학 진영의 무시와 냉대가 뿌리 깊고 역사가 오랜 일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격문학에 대한 장르문학의 비난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원리적으로 봐도, 장르문학이나 본격문학이나 각기 제 몫을 가지는 것이지 서로 배척하는 것일 수 없기에 나의 유감은 쉬이 스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유감스러운 상황이 다소 완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예술과 달리 문학이 보이는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문학의 반(半)예술(semi-art)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세미 아트란 말은 온전하지 못한 반쪽짜리 예술이라는 뜻이다. 반예술로서의 문학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다른 예술과 달리 문학에서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예술 작품다운 작품은 아닌 경우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로서의 문학작품과 문학작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예술은 못 되는 경우가 섞여 있는 것이 문학이고 그래서 문학은 반쪽짜리 예술이라는 말인데, 이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문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문학작품처럼 보이는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예술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이러한 사정이 명확해진다. 음악이나 미술, 조각 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넘어서기 어려운 문턱이 여러 차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질료다. 그림을 배워 본 사람이라면 다 알듯이 수채화가 됐든 유화가 됐든 물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부터가 일이다. 음악의 질료인 음이나, 조각의 질료인 돌 혹은 금속 등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둘째 문턱은 도구인데 이것도 만만찮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초급 단계에서 거쳐야 하는 바이엘, 체르니 등을 떠올려 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겠다. 이렇게 대부분의 예술은 그 질료나 도구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될 때까지의 고된 훈련이 문턱으로 작용해서 아무나 덤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어떠한가. 정반대에 가깝다. 문학의 질료는 글인데, 우리가 다 알듯이, 모국어 글쓰기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다들 할 수 있는 일이다. 문학의 경우는 질료와 구분되는 도구가 따로 있지도 않다. 문학의 도구 또한 언어다. 태어나서 불과 몇 년이면 익히게 되는 언어가 질료이자 도구여서, 문학의 경우는 다른 예술들에서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문턱이 전혀 없다. 해서, 누구라도, 해 볼 의향만 있으면 시나 소설을 써 볼 수 있게 된다. 결과는 무엇인가. 문학 전문가가 보기에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 문학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는 아닌 문학 곧 '사이비 문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문학을 반예술이라고 하는 말은 이렇게 본격적인 작품과 사이비 문학작품이 공존하기 쉬운 문학의 특성을 가리킨다. 문학과 사이비 문학의 경계가 고정된 것이 아님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데, 이 둘 사이의 스펙트럼 속에 본격문학도 장르문학도 제 자리를 갖는다.

문학의 기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문예학자 미하일 바흐친이 알려 주듯이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주요 기능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그러한 기능을 해 온 과거의 문학은 대체로 가담항설(街談巷說) 수준의 민중문학이었다. 사람들이 즐겁자고 주고받는 이야기가 서사문학의 원형이요 줄기며, 민중이 일하며 쉬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서정문학의 근원이자 씨앗인 셈이다.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장편소설이 서사문학의 대표적인 장르가 되고 사회와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본령으로 삼게 되면서 사태가 좀 복잡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즐거움을 주는 문학예술의 기능이 없어진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한 기능이 보다 특화되어 유흥으로서의 문학에 해당하는 대중문학과 장르문학으로 분화되고 대중의 사랑을 담뿍 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을 나누는 이분법은 시장에서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문예학에서 보아도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사실 문학예술의 형세를 전체적으로 보면 문화 산업의 산물들이 전 세계적인 지배력을 강화하는 현상을 우려해야 할 판이다. 문화의 다양한 발전이 저해되는 까닭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2017년에 발표된 '죽음'이 본격문학에 대해 보이는 원한에 가까운 비판은 지나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착잡하고 안타깝다. 프랑스의 문화가 재미의 가치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소설 '죽음'에서 확인되는 베르베르의 이러한 강퍅함은 어디서 왔을까 싶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학부장·문명시민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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