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에 빠진 윤길중 작가 "석상도 망자의 인품을 반영하는 것이죠"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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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21   |  발행일 2020-04-22 제21면   |  수정 2020-04-22
대구 남구 이천동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5월17일까지 사진전 'Human Desire'
윤길중
윤길중 작가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그의 사진집 'Human Desire'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이번 전시는 석상을 찍은 20여점과 신작 10여점이 선보인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사진작가 윤길중의 작업은 무덤과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석상을 대상으로 한다. 비슷한 듯 다른 표정의 석상에서 그가 읽어내는 것은 인간의 간절한 바람이다. 그 간절함으로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을 꿈꾸고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돌을 깎고 세웠을 것이다. 오랜 세월과 모진 풍파에도 스러지지 않는 돌처럼 그 바람을 지켜 주리라 믿으며.

 

5월17일까지 대구 남구 이천동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열리고 있는 윤 씨의 사진전 'Human Desire'는 그 욕망의 기록이다. 윤 씨는 이 작업을 위해 5년여 동안 전국의 무덤과 마을 800여곳을 찾아다녔고 1천700장 가까운 석인상과 석장승을 찍었다. 녹록하지 않은 삶 속에서 위안을 얻고 미래의 희망을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 석상에 영혼을 새겨 죽어서도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오롯이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석인상은 왕과 사대부의 무덤 앞에, 석장승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입니다. 석상의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표정에 매력을 느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부릅뜬 퉁방울 눈, 분노에 벌름거리는 펑퍼짐한 코,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재미난 입 모양을 한 정겨운 얼굴 등 하나하나의 표정과 만날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우리 선조들은 돌을 조각해 무엇을 담아내고자 했을까, 왜 석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왜 그들을 기원의 대상으로 삼았던 걸까,라는 물음에서 이어진 작업입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체계적인 자료는 없고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렵게 찾아갔지만 길이 없어 못 찍고 내려오는 일도 허다했다. 석상의 표정을 살리기 위해 굳이 비오는 날을 선택한 것도 작업을 어렵게 했다. 비를 맞으며 사다리를 메고 산길을 헤쳐 무덤 앞 석상을 찾아가는 그를 두고 주위에선 "귀신이 씌였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


후반 작업은 더 힘들었다. 오롯이 석상만 남기고 배경은 모두 지워냈다. 석상의 표정을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거니와 애당초 배경 자체가 중요한 요소가 아니어서다. 프린팅 작업 역시 배경을 지워내는 것만큼 힘들었다. 돌의 질감을 입체감 있게 보여주기 위해 한지를 선택한 때문이다. 전통 방식으로 배접한 한지에 흑백의 석상을 프린팅한 뒤 옻칠이 들어간 코팅까지 작업의 복잡함과 세밀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런 힘들고 수고로운 작업 과정을 통해 돌에 새긴 인간의 기원(祈願)은 비로소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석상은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강희명 선생의 묘에 있는 석상이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정승의 묘인데도 석상은 소박하고 아담하니 기존 석상과는 완전 다릅니다. 석상도 망자의 인품을 반영하는 것이죠. 이처럼 망치와 정 하나로 많은 표정 속에 간절한 욕망을 심은 이들이 저는 진정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 


이번 전시는 윤씨의 작품집 'Human Desire'의 출간을 기념해서 열린다. 석인상 10여점과 석장승 9점이 전시됐고 석상 1천인상을 포토샵으로 모아놓은 작품은 갤러리 야외 외벽에 설치되어 볼거리를 더했다. 


윤씨의 신작 '씨소우(SEE SAW)' 시리즈도 선보인다. 생화와 조화를 같이 넣어 찍거나 사과를 불에 태워 형태와 컬러만 남긴 것 등으로 기존의 작업과 완전히 다른 기법을 활용한다. 일상 속에서 가짜와 진짜의 의미, 본다는 것의 의미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공개하는 작업으로, 브뤼셀에 이어 세르비아 뮤지엄에서 전시가 예정되어 있으며 지난해 프랑스 아를과 휴스턴 사진비엔날레에서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Human Desire'전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 이어 7월 서울, 8월 광주전으로 이어진다. 


윤씨는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사물과 사람에 대해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다. 장애인들과 오랜 기간 소통하며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작업한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에서 장애인들의 일상을 그만의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였으며, 시화호를 만들면서 육지가 된 형도와 그 곳 갯벌을 복토한 땅에 뿌리 내린 나무들의 상처와 삶을 그려낸 'picturesque 詩畵', 북아현동의 재개발지역을 촬영한 '기억흔적' 등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오브제에 생명을 불어넣어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편, 작품집 'Human Desire'는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와 일본의 아카아카(AKAAKA)의 공동출간으로, 인쇄와 제본 등 제작은 모두 일본에서 진행되었다. 2019 Paris Photo의 포토북 페어인 'Poly Copies'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석인상 40장과 석장승 30장 등 총 70장의 작품이 담겨있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석재현 대표와 일본 아트북 출판사인 아카아카사의 키미히메노 대표가 공동으로 기획했고, 윤씨가1년 동안 서울과 대구, 교토를 오가며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집이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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