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도토리, 다람쥐 그리고 돼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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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4   |  발행일 2020-06-04 제26면   |  수정 2020-06-04
숲에 가면 만나는 도토리를
흔히 다람쥐 먹이로 알지만
사실 돼지와도 매우 친숙해
돼지의 옛말 돝 등이 결합된
도토리 어원에서 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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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미주 경북대 교양교육센터 강의초빙교수

저녁 메뉴로 돼지고기를 굽기로 한다. 스페인에서 온 돼지고기란다. 돼지고기는 뭐니 뭐니 해도 제주도 흑돼지인데 웬 스페인 고기야 하면서 굽는다. 돼지고기가 거기서 거기지 하면서 한입 물었는데, 쫄깃함과 고소함이 강렬하다. 야생 방목하며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라더니 그 풍미가 상당하다. 아이도 그동안 먹어왔던 고기 맛과 다른지 엄지를 치켜세우며 연신 맛있다를 연발한다. 아이한테 포장지의 설명대로 돼지들이 숲에서 도토리를 먹고 자라서 맛있는 거라고 했더니, 아이가 '도토리를 돼지가 먹어? 도토리는 다람쥐가 먹는 건데' 이런다. 진짜 돼지가 들으면 섭섭할 말이다.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가을에 숲에 가면 가져가지 말고 다람쥐 먹이로 남겨달라고 도토리 수거함을 설치해 놓기도 하고, 매체에서 도토리와 다람쥐를 같이 등장시키는 경우를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다람쥐뿐만 아니라 돼지도 도토리 잘 먹고 좋아하는데…. 돼지는 억울하다. 더구나 '도토리'의 어원이 돼지와 관련이 있는데 도토리를 다람쥐만 먹는 것으로 생각하다니, 돼지 입장에서는 섭섭할 일이다.

돼지의 섭섭함을 풀어주기 위해 먼저 '도토리'의 어원부터 살펴보자. '도토리'는 '향약구급방'(1417년)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서 도토리를 한자를 빌려 '저의율(猪矣栗)'로 지칭하고 있다. 이때 '저(猪)'는 '돼지', '의(矣)'는 속함을 나타내는 조사 '-의', '율(栗)'은 '밤'을 의미한다. 즉 돼지가 먹는 밤이라는 의미다.

돼지의 옛말은 '돝'으로, 돼지고기를 지칭하는 단어인 '돝고기'와 속담 '멧돝 잡으려다가 집안돝 놓칠라' 등에서 돼지의 옛말 '돝'을 접할 수 있다. 이 '돝'에 속함을 나타내는 조사 '-(ㅇ+ 、+ㅣ) '와 '밤'이 차례로 결합하여 '도(ㅌ+ 、+ㅣ)밤'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도(ㅌ+ 、+ㅣ)밤'은 '도토밤, 도톨왐, 도톨밤'으로 변하게 되는데, '도톨밤'으로 변하면서 이 단어에서 '돝'과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돝'과의 관련성을 찾기 어렵게 되면서 도토리의 껍질이 도톨도톨한 데 착안해 '도톨-'에 '-이'가 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도토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공장식 축산이 일반화되어 돼지들이 사료를 먹는 지금, 도토리가 돼지의 주된 먹이라는 것은 더욱 낯설 수밖에 없다. '도토리'라는 단어에서 돼지와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게 되고, 사육 환경의 변화 등으로 돼지와 도토리의 연관성은 점점 약해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그러면 '돼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단어일까? 돼지는 '돝+(ㅇ+ 、+ㅣ) +지'의 구성으로, '돝의 새끼'라는 의미다. 이때 '아지'는 새끼를 나타내는 말로, '망아지, 강아지'에서 보듯이 말과 개의 새끼를 '아지'라는 단어를 결합해 만든다. 그러니 원래 '돼지'는 '돝의 새끼'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성돈(成豚·다 자란 돼지)을 의미하게 되었다. 돼지가 성돈을 의미하게 되면서 '돼지 새끼'가 낳은 지 얼마 안 된 어린 돼지를 가리키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온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고기를 먹으며 생각한다. '역시 사료 먹인 돼지보다 도토리를 먹인 돼지가 맛있구나. 역시 원래의 서식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돼지가 맛있는 법이야.' 이런 생각을 하니 돼지에게 좀 미안하다. 돼지의 섭섭함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한 글은 돼지에 대한 미안함으로 끝을 맺는다.
홍미주 경북대 교양교육센터 강의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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