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경상도 국수열전 (1)대구 칼국수 추억을 찾아서②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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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19   |  발행일 2020-06-19 제34면   |  수정 2020-06-19
멸치육수·생면·청방배추 한데 끓여내…후루룩 국물 들이켜듯 술술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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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수육이 가미된 '동곡 할매칼국수'. 누른국수 계열이지만 한꺼번에 면을 삶지 않고 면발을 한번 찬물에 헹궈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이 방식은 서문시장 칼국수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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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 국수난전도 직접 칼로 썰어서 자가제면하는 점포형 국숫집과 시장통 리어카 좌대에서 건진국수 형태로 파는 두 스타일로 갈라진다. 한 국수가게 아줌마가 국수의 면발을 잘 익히기 위해 국자로 휘휘 젓는 장면이 무술 영화의 한 동작처럼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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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테라피스트로 부산에서 활동 중인 국수연구소 김성윤 소장이 운영하는 연구소 벽에 장식품으로 부착된 국수 이미지. 놋 접시에 건면을 부착한 게 인상적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대구국수'를 유달리 '누른국수'라며 좋아했다. SNS에 길든 젊은층은 누른국수를 그냥 누른빛깔의 국수로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누른빛이 감도는 국수다. 그런데 그 누름의 의미를 그들은 알 수가 없다. 요즘 상당수 면발은 연두색 기운이 감도는 노란색을 갖고 있다. 콩국수 전문점에 가도 대량유통되는 공장표 국수를 사용한다. 언뜻 쫄면 같은 기분이 든다. 토박이는 노르스름한 현대판 면발이 맘에 들지 않는다. 누르스름해야 된다고 고집한다.


누른국수를 찾아서
중구 금와식당 1대사장 김덕분 할매
재래식 국수공장서 기계로 뺀 생면
직접 담근 간장양념장·겉절이 궁합

주택가 국숫집서 팔던 매끈한 면발
면·채소 국처럼 끓여내 환상의 식감

달성 하빈면 동곡시장 내 원조할매
경주할매·상주전통칼국수 등 명성
70년대 절정 시청 인근 누른국수촌
어슷하게 썬 돼지고기 수육 인기
샤부 칼국수 명가로 우뚝 선 바르미

여름별미 냉·온면
제대로 된 냉면집서 내놓는 온육수
아랫배 냉기 달아나는 뜨끈한 면수


◆금와식당의 누른국수를 찾아서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 대구 중구 동산동(도로명으로는 서성로) 엘디스리젠트호텔(옛 동산호텔) 동쪽 굽어진 도로 모퉁이에 있는 금와식당. 금와(金蛙), 금개구리란 의미다. 부산에서 대구로 온 1대 사장 김덕분(83) 할매. 동성로 동인호텔 옆에서 20년 이상 장사를 했다. 이후 남동생인 김영배씨 내외가 가업을 이어받았고 1989년 현재 자리로 이전해 왔다. 이전한 뒤부터 할매는 가업에서 손을 뗀다. 기술을 다 이전한 탓이다. 그 할매는 '차 마담'으로 불렸고, 식당은 금뚜꺼비집·동산할매집 정도로 불렸다.

메뉴판에는 누른국수란 명칭이 없고 그냥 칼국수로 적혀있다. 굳이 누른국수라 하지 않아도 단골에게 주지의 사실이라 여긴다. 면발은 오래전부터 대구 북구 고성동 2가에 있는 월성국수(현재 통일식품)의 생면을 받아 사용한다. 이런 계열의 가내수공업 형태의 국수공장으로 북구 조야동 남문국수가 있는데, 이 공장은 동구 신암동의 국수명가 중 한 곳인 태양칼국수에 전량 납품한다. 금와의 면발은 중면보다 조금 더 굵다. 칼로 썬 칼국수에 비하면 몸집이 훨씬 약하다. 얼추 3㎜도 안 될 것 같다. 매일 중간 크기의 건멸치를 똥도 빼지 않고 사용해 다시를 만들어 낸다.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손님이 오면 멸치다시를 끓이고 이때 청방배추와 면발을 넣고 15분가량 푹 끓인다. 김가루, 고깃가루, 애호박 등도 누른국수 특유의 매끈한 맛을 방해한다고 넣지 않는다. 그냥 국수, 멸치다시, 그리고 청방배추, 그게 전부다. 물론 직접 담근 조선간장으로 만든 양념장을 적당량 올린다. 옹기에서 갓 퍼낸 날된장, 적당한 매운 기운을 가진 퉁퉁하면서도 가느스름한 풋고추. 그리고 겉절이배추김치. 너무나 간단하고 너무나 단순해 언뜻 잔치국수와 칼국수가 결합된 스타일로 보인다.

그 시절 누른국수의 영광을 위해 골목 국숫집에서 만들었던 생면은 신문이나 누런 봉다리에 담아 팔았다. 그 시절 경상도 아녀자들은 누른국수의 달인이었다. 그 국수의 연장에 있는 게 묵은지와 콩나물 등이 가미된 갱시기(국시기·밥시기·갱죽 등으로 불림)였다.

누른국수는 대구국수의 춘추전국시대, 그러니까 풍국면, 소표, 말표, 닭표, 기린 등 수십 개의 대형 국수공장이 호경기를 누렸던 1940~60년 건국수 시절을 새롭게 대구기질답게 발전시킨 형태라 보면 된다. 공장에서는 주로 마른 소면과 칼국수면을 생산했다. 주택가 근처 국숫집에선 떡방앗간처럼 제면기를 한두 대 놓고 생면을 만들었다. 주로 새벽에 일어나 오전 5시 이전에 작업을 마쳐야 된다. 그래야 그날 소비할 주문이 밀려든다. 상당수 주부가 그 집에서 국수를 사 갔다.

집에서 먹던 그 누른국수는 두 단계로 만들어졌던 잔치국수와 달리 한꺼번에 국처럼 끓여냈다. 잔치국수는 면발이 잘 끊겼지만 누른국수는 조선백자의 표면처럼 면발이 투명하고 매끈거려 더없이 목구멍 안으로 잘 넘어갔다.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듯 누른국수를 별로 씹지도 안고 삼켰다. 토박이들은 누른국수는 마시는 음식이지 씹는 음식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목 넘김에 방해를 하는 식재료를 넣지 않았다. 채택된 채소가 청방배추와 같은 얼갈이채소류였다. 시금치 같은 것도 좋을 것 같지만 뿌리에서 단맛이 많이 스며 나와 육수 맛을 달짝지근하게 만든다 싶어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미원도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멸치육수와 면수, 그리고 배추의 채즙이 환상의 식감을 자아낸다.


◆누른국수를 이은 새로운 국수명가들

김덕분 할매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 몇몇이 독립을 했지만 다 롱런하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현재 대구의 누른국수 계열의 국수가게는 금와식당을 비롯, 달성군 하빈면 동곡시장 내 동곡원조할매손칼국수, 대구백화점 북쪽 골목 안에 있는 경주할매칼국수, 명덕로타리 근처 할매집, 경상감영공원 동편 중앙상가 1층 상주전통칼국수, 2004년 황금동에서 생겨난 본가안동국시 등이 명맥을 잇고 있다.

누른국수의 전통은 70년대 절정기를 맞는다. 옛 국세청(현재 대구노보텔) 근처는 누른국수촌으로 발전하게 된다. 분식장려를 받던 대구시청 공무원 등이 많이 찾았다. 그땐 유독 돼지고기 수육이 인기였다. 이땐 꼭 암뽕(돼지자궁)을 시켰다. 누른국수 옆에서는 수육이란 명칭보다 암뽕이 제격이었다. 누른국수 하나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싶어 다들 대·소 암뽕을 시켰다. 누른국수에는 그게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돼지수육도 너무 일렬종대로 가지런하게 썰면 퇴짜를 맞는다. 대구탕 끓일 때 무처럼 어슷하게 썰어줘야 한 맛이 더 나게 된다.

누른국수의 전통은 80년대 중반 오뚜기 등 서울발 대기업 국수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누른국수의 인프라는 새로운 시대의 맛을 품고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79년 생겨난 신암동 태양칼국수, 83년 수성구 범어네거리 모퉁이에서 출발해 신천동으로 이전한 고향집칼국수, 대구교육청 근처 참깨국수, 90년대 후반에는 들안길에서 새로운 감각의 국수 명가가 탄생한다. '3인분 같은 2인분 대야 해물칼국수'의 돌풍을 일으킨 봉창이칼국수와 샤부칼국수의 리더인 '바르미칼국수'였다. 바르미는 시내 대백 옆에서 명동칼국수 전통을 딛고 샤부칼국수의 명가로 우뚝하게 선다. 둘은 들안길에서 경쟁을 했지만 비약적 발전을 보이던 봉창이는 끝내 무릎을 꿇고 만다. 이후 염매시장 안에선 간판을 달지 않는 문패 없는 홍개칼국수가 돌풍을 일으킨다. 대구 CBS방송국 근처에서 한강 이남 최강 콩국수로 불렸던 칠성동할매칼국수도 침산 근처로 이전해 모던한 업소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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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른국수의 면발은 칼국수보다 가는 게 특징이다. 언뜻 소면과 칼국수의 절충 형태로 보인다.

◆누름의 비밀은 뭘까

그 시절 누른국수는 수입산 밀가루와 달리 껍질째 도정해 거칠거칠하고 누른 빛이 감돌았다. 요즘 해말쑥한 표백된 수입 밀가루의 백색과 차이가 있다. 오뉴월 밀밭의 그 누르스름한, 일견 민초들의 삼베옷의 질감 같았다. 멸치다시 물은 누른국수에겐 신의 한수였다. 진주냉면도 육수를 낼 때 멸치를 사용한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벌겋게 단 무쇠를 집어넣기도 했다. 누른국수와 잔치국수의 다싯물은 향미의 강도가 다르다. 누른국수는 은은하게 풍겨 나와야 된다. 하지만 잔치국수의 다싯물은 노골적이랄 정도로 강하게 밀고 나와야 된다. 누른국수 편에 선 다시는 면발의 목 넘김을 도와주는 윤활유라고 할 수 있다. 위장이 안 좋고 전날 과음을 한 주당들은 면발을 다른 사람에게 덜어주고 자신은 국물만 먹고 일어서기도 한다. 70년대만 해도 누른국수 다싯물은 해장국의 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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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처에 국수촌이 있는데, 그중 대구 서문시장 국수난전은 무려 100여 개가 모여 형성됐다. 다들 1970년대 생겨났는데, 가장 오래된 곳은 아진상가 뒤편 국수골목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했던 '왕근이'였다. 현재는 대구 북구 칠곡 3지구 쪽으로 이전했다.

◆국수의 기원을 찾아서

유리처럼 차분하고 매끈하게 내리면 당면·소면·쫄면 같고 우당탕거리면 칼국수 같고 흙먼지가 섞이면 메밀국수 같다. 우박이 내리면 그건 감자 전분으로 만든 '강원도 옹심이'처럼 보일 것이다. 촌부의 눈에는 누에 같은 오뉴월 밤꽃도 올챙이국수로 보인다. 속이 차가워진 자에겐 냉면집의 사골 향기 번지는 온육수, 국수가 가마솥에서 면발을 삶을 때 스며 나온 전분기가 머무르는 뜨끈한 면수(麵水)를 한 모금 먹으면 아랫배에 도사린 냉기가 금세 달아난다.

제대로 된 냉면집에는 반드시 온육수가 있어야 한다. 역사가 묻어나는 칼국숫집에는 면수가 제1 미덕이랄 수 있다. 그런데 요즘 그걸 제대로 내는 집을 찾기 힘들어진다.

아무튼 국수의 추억과 맞물려 돌아가는 하절기의 초입이다. 텃밭에 심어둔 호박도 제법 튼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지난해 김치는 이 무렵 너무 쉬어 버려 한번 씻어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퀴퀴한 군내를 제거해 물국수 먹을 때 고명이나 반찬으로 곁들여도 좋다. 이때 풋고추와 날이 잘 선 날된장도 국수와 찹쌀궁합을 보인다. 식성 좋은 사람은 소면 같은 건 단숨에 박살 낸다. 주먹만 한 면발을 두세 번 목구멍 깊숙이 집어 넣은 뒤 감칠맛 나는 멸치육수를 벌컥 들이켠다. 바닥엔 고춧가루 한 점 남는 게 없다.

더운 계절이지만 차가운 냉면 못지않게 뜨끈한 온면도 사랑을 받는다.

그 시절 노모들은 홍두깨와 반죽 만들 때 사용하는 면판(麵板)을 부적처럼 대했다. 둥그렇게 펴진 반죽을 몇 번 접어 칼로 썰어낼 때 사용됐던 도마의 중심부. 수없는 칼금이 교차되면서 중심부는 움푹 패여 버렸다. 신산스러운 노동에 거칠대로 거칠어 버린 노모의 손과 닮은꼴이었다. 다음은 '추억의 국수공장' 편이 이어집니다.

글·사진= 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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