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미술관과 커피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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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4   |  발행일 2020-07-14 제20면   |  수정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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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2000년 7월 이맘때 홀로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여행서적의 바이블인 '세계를 간다' 유럽 편을 들고 배낭에는 두 달치 필름 50통과 선물용 호돌이 책갈피 스무개도 쓸데없이 챙겼다. 1호선만 타본 필자가 히드로 공항을 빠져나와 런던중심가로 향하는 여정은 마치 신대륙 개척과도 같은 모험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에도 그렇게 여행을 했다. 어쨌든 그날 느낀 충격과 흥분은 잠시 접어두고 가장 먼저 간 곳은 테이트 모던이었다.

템스강 옆에 흉물처럼 방치된 뱅크 사이드 화력발전소가 밀레니엄을 맞아 재단장한 미술관은 그 해 5월 개관했다. 당시만 해도 미술관 주변은 호감이라곤 전혀 풍기지 않는 칙칙함 그 자체였다. 사실 그 이후 몇 년간도 죽 그랬다. 어쨌든 나의 목표는 뒤샹의 '변기'였는데, 현대미술을 하려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테이트 모던은 당시 미술학도인 필자의 가슴속에 가장 멋지고 아련하게 기억된다. 거대한 터빈홀에 설치된 루이스 부르주아의 더 거대한 거미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이유는 다름 아닌 커피 때문이었다.

전시를 한참 보다 다리도 아프고 배가 고파 미술관 카페에 쭈뼛쭈뼛 들어서 커피 한잔을 시켰다. 국내 스타벅스가 1999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아메리카노' 감성이 우후죽순 퍼졌다면 필자에게 아메리카노의 이데아는 그날 미술관 카페에서 마신, 독하리만큼 진한 커피다. 비싼데다 쓰기만 해 첨엔 속상했는데 홀짝홀짝 마시다보니 어느새 잔이 비어 있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흘러내릴 듯한 페인팅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뒤틀린 육체, 신화가 된 요셉 보이스의 육중한 돌덩이들, 뒤샹의 '그' 변기,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의 약방을 거쳐 마침내 아늑한 카페에 들어서 바깥 풍경을 위안삼아 혼자 보낸 그 시간의 잔상들이 커피 한잔과 함께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후 국내건 해외건 낯선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언제나 그 커피 맛을 찾았던 것 같다.

좋았던 작품도, 때론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전시를 보고 난 후 커피 한잔 앞에 두면 작은 행복이 생긴다고 믿는다. 요즘 들어 미술관 전시를 보고 나서는 관람객의 뒷모습을 볼 때면 우리미술관에도 그런 카페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특히 혼자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을 보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커피 한잔에 오늘 본 작품을 잔상에 남기고 가끔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이정민<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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