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조선시대 안동 양반家의 네 여인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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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30   |  발행일 2020-10-30 제35면   |  수정 2020-10-30
가문 굳건히 한 여인들…절절한 思夫曲으로 400년 지나 감동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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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인 안동장씨 초상화(왼쪽). 안동시 정하동 대구지검 안동지청 입구 원이엄마 동상.
안동의 과거를 거닐다 보면 16세기 동시대에 살았던 네 명의 훌륭한 조선 여인을 만나게 된다. 양반 가문의 딸로 태어나 한미한 시댁을 명문가로 만든 세 여인과 400년 만에 무덤에서 출토된 한글 편지와 미투리 사연으로 후세 사람의 눈물샘을 건드린 원이 엄마가 그들이다.

◆약봉가의 어머니 고성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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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가 약봉 서성을 낳은 안동 소호정.
고성이씨는 안동시 법흥동 99칸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손녀로, 아버지는 청풍군수를 지냈다. 5세 때 약물이 눈에 들어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여중군자'라 불렸다. 우여곡절 끝에 퇴계 제자인 대구서씨 총각과 혼인했고 1558년 친정인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에서 약봉 서성을 낳았다. 약봉가의 산실이 된 소호헌은 조선 중기의 아름다운 반가 건축물로 현재 보물 문화재다.

이듬해 남편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고성이씨는 어린아들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한양 약현(藥峴)으로 이사를 가서 하인과 함께 청주를 빚고 유밀과, 찰밥, 강정 등을 만들어 팔았다. 평판이 좋아 서울 사람들은 고성이씨가 만든 음식을 약주·약밥·약과라 칭하며 다투어 사갔고 이들 음식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가계를 꾸려나가면서도 자식교육에 힘을 기울여 아들 서성은 송익필과 율곡에게 학문을 배워 29세에 대과급제했다. 김장생과 교유하고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조선 시대 선조가 승하할 때 유명(遺命)을 내린, 신임하던 일곱 사람의 신하.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의 한 사람으로 조정 중신이 되었고 벼슬은 5도 관찰사와 3조 판서를 지냈다.


고성이씨
임청각 지은 이명의 손녀
남편 젊은 나이에 세상 뜨자
한양서 청주 등 빚어 팔아
약주·약밥·약과 이름 유래



고성이씨는 임청각에서 놀던 배포로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대저택을 지었다. 집을 지을 때 목수가 대청 기둥을 거꾸로 세웠는데 나무의 재질을 손으로 만져보고 마치 본 것처럼 잘못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들이 식구도 적은데 큰집을 짓는다고 비웃었으나 '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이다. 대청이 아니고 소청이 될 것이니 그때에는 마당에 보계(補階)를 매지 않고는 아니될 것이니라'라고 일갈했다.

77세까지 장수한 고성이씨 소망은 생전에 이루어졌다. 칠순잔치 때 슬하 자손이 19명이 되었고 아들 서성은 7남4녀를 두었는데 큰손자 서경우가 우의정에 올랐고 끝손자 서경주가 선조 부마가 되었다. 가문은 일취월장했으며 후손으로 영의정 6명, 대제학 5명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가 123명 탄생했다. 고성이씨는 인조부터 고종까지 300년 한양의 권세가로 군림한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이름 떨쳤던 노론명문가 대구서씨 약봉가 개산조의 어머니가 되었다.

◆무실정려각 의성김씨 김옥정

김옥정은 임하 내앞(川前) 의성김씨 대종가 김진의 큰딸이자 학봉 김성일의 누이다. 영주에 사는 전주류씨 총각과 혼인해 친정 농장이 있는 무실(수곡)에 세거했다. 어린 아들 둘을 남기고 남편이 요절하자 김옥정은 친정아버지에게 자손이 번창할 묘자리라고 알려진 터를 달라고 간청해 얻어냈고 무실류씨 후손은 크게 발복했다고 한다.

3년상을 마친 뒤 어린 두 아들을 동생 김성일에게 맡겨 시댁 가문의 앞날을 부탁하고 단식, 자결했는데 그녀 나이 28세였다. 조정에서는 김옥정의 열행을 높이 평가해 1635년 정려(旌閭)를 내려 비각을 세웠고 비석 뒷면에 언행을 기록해 열부의 뜻을 새겼다. 이 비각이 수곡에 있는 '의성김씨 무실정려각'으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김옥정
남편 요절 후 삼년상 치르고
동생인 학봉에 두 아들 맡겨
28세 때 식음전폐하며 자결
조정서 비각 세워 기리기도


두 아들은 외삼촌 학봉의 가르침으로 일문을 세웠고 어머니 뜻을 가훈으로 기렸다. 큰아들은 임진·정유 양란에 공을 세워 가문을 빛냈고, 작은아들은 학봉을 따라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우다가 진주성 2차 전투에 순국했다. 무실입향 100년 만에 증손자 류지가 장원급제하고 경주부윤에 이르자 김옥정은 숙인(淑人)으로 추증되었다. 대과 급제자가 연이어 나오고 후손이 번창해 영남세가로 우뚝 섰고 특히 문집 발간 후손이 100여 명이 되어 '글구덩이 집안'이라 했다.

혼맥이 얽히고설킨 안동 양반가에서 내앞 김씨와 무실류씨 집안의 내외종간 우애는 '천김수류(川金水柳)'라 해 수백 년간 양반가의 귀감이 되었고 문중세가 번성하여 영남만인소에 참여 유생이 가장 많은 집안이 되었다. 후손으로 퇴계정맥을 이었다는 류치명을 비롯해 구한말 류인식, 류필영, 류림이 독립운동가로 큰 족적을 남겼다.

400년을 이어오던 세거지는 임하댐 건설로 모두 수몰돼 종가를 비롯한 일부는 옛 수곡마을 뒷산으로 옮기고 새 거주지를 구미 해평에 마련, 집단 이거했지만 무실류씨 후손은 어디에서든지 정려각 할머니의 전설 같은 열행을 가슴에 품고 있다. 이곳 출신 서울대 명예교수 류안진 시인은 고향 안동을 '어제의 햇빛으로 오늘이 익고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이라 했고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참말로 저마다 제몫을 하는 곳'이라 했다.

정부인 만년의 영양 두들마을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이 시집가서 한국 첫 한글로 된 고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펴낸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음식디미방 안동장씨 장계향

장계향은 퇴계학파 대학자 서후면의 안동장씨 장흥효의 딸이다. 어린 시절부터 재녀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천재성을 말해주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19세에 영양 재령이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일곱 아들을 길러 친정아버지에게 보내 퇴계학맥을 잇게 하는데 둘째 이휘일이 대학자로 성장하고 셋째 이현일이 산림(山林)으로 이조판서에 올라 17세기 영남 남인을 이끌게 된다. 손자 이재까지 문명을 떨치는데 이재의 외손이 이상정이고 이상정의 외증손이 류치명이다. 장계향 핏줄이 퇴계학파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자 조정에서 그녀에게 정부인(貞夫人)의 봉작을 내린다.


장계향
퇴계학파 대학자 집안의 딸
일곱아들 친정아버지에 보내
시문·서화·의술 조예 깊어
75세에는 음식디미방 저술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나온 장계향은 10명의 자녀와 조카를 훌륭히 키워 후세 사람들에게 위대한 어머니로 존경받고 있으며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와 편지글이 전해오고 있다. 의술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친정 집안과 시댁 가문을 모두 일으켜세움으로써 시대를 앞서 간 조선 여인으로 평가받으며 기호의 신사임당과 쌍벽을 이룬다. 그녀의 유고와 행장을 엮은 시문집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가 현손(손자의 손자)에 의해 발간돼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장계향은 75세(1672년) 때 국내 첫 한글요리책 '음식디미방'을 썼다. 당시 봉제사 접빈객은 양반가의 과업이므로 음식요리는 매우 중요했고 구전으로 전승돼 오던 반가요리가 처음 책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작가는 음식디미방은 요리책이 아니라 여성이 도(道)에 이르는 방법을 조목조목 기록해 놓은 경전이라 했고 영남 반가음식 연구에 보물이 되었다. 살아생전 재령이씨 영해문중을 영남명문가로 올려놓았고, 죽어서 요리책 한 권으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조선 여인으로 이름 세 글자를 기념관에 붙인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장계향기념관은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있다.

원이엄마 편지 수정본
먼저 간 남편을 애절하게 부르며 적은 원이엄마의 '사부곡' 같이 절절하기만 한 편지.

◆400년만에 외출, 원이엄마

1998년 낙동강변 안동 정상동의 한 무덤에서 한글로 쓴 한지 편지와 미투리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덤 주인은 31세에 요절한, 훗날 원이엄마로 유명해진 고성이씨. 요절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편지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섞어 만든 미투리를 극락정토로 가는 남편의 반야용선에 실어 보냈다. 원이엄마가 입던 치마, 아들 원이가 입던 저고리, 형의 만장시가 함께 나왔는데 모두 저승의 어두운 세계에서 이승의 밝은 세계로 412년 만에 첫 나들이했다.


원이엄마
낙동강변 무덤서 한글편지와
먼저 떠난 남편 그리움 담은
머리카락 섞은 미투리 출토
국악·오페라로 부활하기도

동시대 안동에 산 네 여인들
요즘이라면 동창 아니었을까



'원이 아버지께, 병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로 시작되는 한글편지는 옛 사람의 부부 사랑이 너무 애절해 눈물샘을 자극했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 신발은 가슴이 아릴 만큼 안타까웠다. 가로 58㎝ 세로 34㎝ 한지에 붓으로 빼곡히 쓴 사랑과 유복자의 이야기는 차라리 숙명이었고 서정주의 시 '귀촉도'를 떠올렸다. 시인은 은장도 푸른 칼로 머리털을 잘라 미투리를 엮어 드리고자 했다. '당신없이 살 수 없어 빨리 당신께 가고 싶다'는 원이 엄마의 절규는 페트릭 스웨이지와 데미무어가 열연한 영화 '사랑과 영혼'보다 더 절절한 내용이다.

어느 양반가문 규수인지 기록이 없지만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춘향이조차 압도할 것 같다. 성리학의 뿌리가 깊게 박힌 안동지역. 거기서 발원된 원이 엄마의 숭고한 사부곡은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안동 양반의 심금조차 울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 이 애틋한 사랑은 국악과 오페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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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안동 역사 속에서 만난 네 여인은 동시대 인물이다. 고성이씨는 원이 엄마에게 시댁 왕고모가 된다. 나이는 20세쯤 차이가 나지만 친정며느리를 모를 리 있으랴. 배포 큰 왕고모는 한양으로 이사 가고 절개 지킨 원이 엄마는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했을 것이다. 의성김씨 김옥정과 고성이씨 할머니는 비슷한 나이로 양가 집안이 매우 친밀했다. 장계향의 아버지 장흥효는 김옥정의 동생인 학봉 김성일의 수제자다. 요즘 같으면 네 여인 모두 명문학교 동창생이겠지만 조선 딸들의 친교는 기록이 없다.

세상의 반은 여인네 삶인데 콩밭 매고 물레질하다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사라진 우리 어메·누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동 땅 반쪽은 조선 딸들의 땅이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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